3.1절 아침에

in kr •  3 years ago 

3.1절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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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대책 없이 독립 만세만 부르다가 짓밟히고 깨진 3.1운동이 뭐 대단한가 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포스팅을 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계사상 모든 사건들이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귀결될 겁니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앞뒤좌우 상황 가리고, 치밀하게 기획하여 단번에 성과를 일궈내는 혁명이나 봉기나 전쟁이나 개혁은 세계사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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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항쟁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임시정부의 표현대로 우리 민족의 '부활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믿었습니다. 불순분자들은 죄다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고, 치안은 튼튼하며 조선인들은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며 살고 있으며 바늘 하나 떨어져도 일본 경찰과 헌병이 알 수 있다고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아주 순박한 노예들이라고 생각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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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노동 이민(이라고 읽고 노예 이민이라고 읽는다) 을 주선한 미국 공사 알렌은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유순해서 반항할 줄 모르는 노동력"이라고 광고합니다. 망할 당시의 조선은 그렇게 보였겠죠.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위해 몽둥이 하나 휘두르지 못한" 즉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안치르고 스르르 망해 버린 나라니까요. 당연히 일본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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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강고한 편견의 지층 아래에서 조선 사람들의 분노는 이미 마그마처러 끓어오르고 있었고, 기미년 3월 1일이라는 분화구를 만나 만세 소리로 폭발한 겁니다. 만세 운동은 독립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조선 민족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절규로 몸뚱이로 알리는, 자존심의 부활이자 존재감의 재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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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촘촘한 일본의 감시망 속에서 연락을 나누고 뜻을 교환하고 조직을 갖추고 책임자를 선정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고 마침내 3월 1일을 맞기까지 이 사실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걸 해냈고, 단순히 33인 민족대표의 선언에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 자신들의 '자주민'임을 알고 행동해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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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고, 그 현장을 지켜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치를 떨고 살인마 전두환을 타도하자고 나서게 됐지요. 저는 3.1항쟁이 그 열 다섯배는 더 당시 조선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구나. " "어 우리가 이럴 수 있구나."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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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부른다고 독립이 돼?" 비웃는 이들은 그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네요. 그러나 일본 경찰 앞에서 만세를 찢어져라 외치는 순간 그들은 이미 독립을 누렸습니다. 노예가 아닌 것을 자각한 사람은 쇠사슬에 묶였어도 노예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나중에 친일파가 됐든 독립운동가가 됐든 적어도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당대의 '인물'들 중 3.1운동의 번개를 맞지 않은 사람은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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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하나도 수많은 오류와 일탈, 반성을 거쳐 일 하나를 이뤄낼진대 역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세 부른다고 독립될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도 않았구요. 그러나 그걸 '무책임한 선동에 의한 무익한 희생'으로 보는 사람들은 역사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역사는 합리적인 기승전결 과정도 아니고, 치밀한 기획과 전후좌우 정리를 통한 깔끔한 이벤트의 연속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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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할지언정 자신의 자유를 위해 나서고, 황당할지언정 남의 자유를 위해 외치고, 순간의 행동으로 평생을 망칠지언정 그 행동이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움직여 갑니다. 아래 링크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검은 장갑을 끼고 블랙파워 시위를 한 두 흑인, 그리고 그 앞에 섰던 백인 육상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그 이후 오랫 동안 이 행동으로 비난받았지만 지금은 모든 인류가 그들을 기립니다. 그런 게 역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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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 가운데 저는 3.1절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천절이야 사실 그날이 그날인지도 모르는 날이고, 광복절은 기쁘긴 하지만 남의 손을 빌린 비중이 너무 크고, 제헌절이야 헌법에 좀 미안한 구석이 있지만, 적어도 조선민족이 "나 부활했어!" 를 선언한, 나 죽지 않았다니까 외치며 일본 지배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날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그날에 대해 틱틱 만세 부른다고 뭐...... 준비도 없이 흥.... 하는 사람들의 냉랭함에 가운데 손가락을 내밉니다. 100년 전 그들에게나 오늘날의 그들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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