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로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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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다녀왔습니다. 인제 천리길 걷기 행사에 참여한 거지요. 말이 걷기지 능선을 타고 계곡을 따라 오르는 산행에 가깝지만요. 강원도 인제 하면 나이 든 남자들은 으레 동부전선에 배치되던 군인들의 신음 섞인 읊조림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를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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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구의 기원에는 설이 많습니다. 전쟁 때 강원도 지역의 고지전이 휴전 직전까지 벌어졌기에 고지전 벌어지는 인제 원통 방면으로 향하는 군인들이 “인제 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하고 울먹였다고도 하고 중동부 지역으로 부임하는 장교들이 만든 얘기라고도 합니다. 결국 그 이후 연인원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이 심심산골에 청춘을 묻으면서 이어온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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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인제는 강원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군이었습니다. 그런데 38선이 그어지면서 대부분 지역이 북한으로 넘어가면서 아예 남한 지역에선 군 이름이 없어지고 화천에 편입되기도 했죠. 휴전 뒤에야 대부분의 인제 땅이 수복돼 강원도 인제군이 복원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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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도 다른 지역에 비해 한참 늦게 실시됐는데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뽑은 것이 1958년의 일이었고 기존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1961년 보궐 선거로 새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그가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5.16 쿠데타로 인해 임기는 한달도 가지 못했지만요. 수복 지역에 최전방 지역인지라 이 지역에는 군인들이 득실거렸죠. 무려 400킬로미터가 넘게 조성됐다는 인제 천리길 어디에도 전쟁과 그 후 70년 동안 군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지 않은 길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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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은 설악마주보기 길을 걸었고 둘째 날은 향로봉 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 설악마주보기길은 임도(林道) 난 길을 따라 올라가 저만치 펼쳐진 설악 능선을 바라보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르는 길목에 낡고 방치된 다연장포 몇 대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연장포 하면 낯선 분들이 많겠지만 북한식 표현으로 하면 귀에 익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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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서울을 위협한다는 ‘방사포’가 바로 이 무기죠. 이 지역에 주둔하던 2사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버려진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한때 무수한 장병들의 손때가 묻었을 다연장포는 비바람을 맞으며 녹슬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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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지루했던 설악마주보기길보다는 향로봉 가는 길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시작점부터가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쪽에 있었기에 군의 통제 하에 인원파악을 끝내고서야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죠. 그야말로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를 걸어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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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으로부터 비롯돼 흘러내리면서 몸을 불린 물줄기들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흘렀습니다. 코스 곳곳에 계곡에 놓아 둔 징검다리를 시야에서 지워 버릴 만큼 말입니다. 그래서 양말 벗고 개울을 건너기도 했는데 그 차가움에 온몸이 섬뜩할 지경이었습니다. “5월에도 영하 5도를 경험한 적 있다,”는 왕년의 12사단 출신 동기의 말이 새삼 실감났지요. 10월 중순에 고드름이 긴 수염을 늘어뜨린 걸 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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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어렸을 때부터 겨울이 올 때마다 ‘영하 30도 가까운 맹추위’로 유명했던 향로봉의 이름이 새삼 뇌리를 덮었습니다. 향로봉 가는 길이라지만 향로봉은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을 뿐 적계 삼거리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진부령 쪽으로 내려와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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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이 점심밥을 비울 때 젊은 장병들은 무심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날이기도 했지만 점심 먹을 때 배식된 국이 금방 차갑게 식을 만큼 쌀쌀했습니다. 우리를 지켜보던 군인들은 우리가 힘들여 올라온 1000미터가 넘는 고지에서 매일매일을 지워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렇게 속으로 말하고 있었겠죠. “내가 제대한 뒤 여기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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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군복에 붙은 사단 마크는 육각형 별이 두 개로 겹쳐진 12사단의 것이었습니다. 을지부대라고 불리죠. 이 부대에 향로봉 대대도 있고 향로봉 중대도 있다고 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향로봉을 지켜 온 부대죠. 향로봉은 백두대간에서는 살짝 비껴나 있지만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이기도 하고 향로봉 북쪽으로는 휴전선이 지나며, 6.25때는 근처에서 피어린 격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1994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공비들도 12사단 마크의 군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백두대간을 타다가 향로봉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갈 심산이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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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이고, 엄청나게 춥고 눈이 무지하게 오기로 유명한 향로봉 근처에는 사건 사고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낑낑대고 올라왔다가 터벅터벅 내려가던 그 길은 병사들이 악으로 깡으로 앞사람 어깨만 보며 행군하던 행군길이었을 것이고 왕년의 ‘황금마차’ 즉 이동식 PX차량이 병사들의 환호를 기대하며 목쉰 기어 소리를 내며 뽈뽈거리며 올랐을 길이고, 2미터 가까이 쌓인 눈을 뚫고 진짜로 ‘살 길’을 찾던 길이었습니다. 내려가는 길 곳곳에 그 아픔의 흔적이 남아 있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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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김 글자가 흐트러져가는 추모비에는 육군 병장 정진구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작전 중 우리가 걷는 이 길 위에서 ‘탈진’해 쓰러져 죽었다고 돼 있었죠. 우리가 흥겹게 스틱 찍고 날렵한 등산화로 다지는 그 길이 한 젊은이가 마지막 머문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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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령 입구에서 칠절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칠섭로’라고 명명돼 있었습니다. 이는 2004년 작전 중 고압선에 닿은 무전기 안테나 때문에 감전된 두 명의 부하를 살리려다가 자신이 감전돼 숨진 김칠섭 중령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병사 두 명은 오히려 경상을 입었지만 그들에게 달려든 김칠섭 중령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예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1970년생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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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거개가 군대에 다녀와서 그런지, 과거 정치 군인들이 판을 치며 사회를 짓누르던 시대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지 한국 사회에서 ‘군대 이야기’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죠. 세상에 재미없는 얘기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군대 얘기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저마다의 극한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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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는 생생하나 남에게는 세상 지루한 것이 군대 이야기고 군대 얘기 집어치우라고 타박하는 일이 다반사지만, 아랑곳도 없고 꿋꿋하게 시선을 45도 상향으로 지그시 바라보며 자신의 무용담을 끌어내는 이유도 그만큼 숨이 끊어질 듯 절박한 순간 때문이었겠지요. 제가 걸었던 향로봉에서 쓰러져 죽은 이들 역시 그 순간만 넘어갔으면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왕년 얘기로 술안주 삼으려 이 하늘 저 산 아래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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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도 좋고 걷기에도 좋았던 길이지만 저는 6.25 이후 이 지역을 걷고 뛰고 구르고 악 쓰던 수십 년 동안의 젊은이들을 떠올렸습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를 합창하던 시절은 지나갔고 다시 오지 않아야 하겠지만, 아직도 인제 원통길에는 제 아들뻘 되는 젊은이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화발과 군용 트럭이 무수히 다졌을 옛길이 새로이 단장돼 사람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걸음 걸으며 그들을 한참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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