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호랑이의 점프
.
입춘입니다만 아직 춥네요. 한 이십년 전 데일리 프로그램 하면서 뺑뺑이 돌 때 봄이 오면 으레 찾는 곳 중 하나가 동물원이었습니다. ‘동물원의 봄맞이’ 같은 뻔한, 하지만 언제나 실패가 없는 아이템의 보고였으니까요. 어느 해 봄,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늘상 동물원을 돌다보니 이번에는 좀 아이템을 좁혀 보고자 해서 나온 얘기가 ‘호랑이 사육사’를 집중해서 팔로우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
과천 동물원 호랑이 사육사 아저씨들을 섭외해서 찾아갔는데 아무래도 호랑이이다보니 근접 촬영은 어려웠습니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 들고 호랑이 앞에 얼쩡거렸다가는 왕년의 비디오테이프 경고 영상에서 봤던 ‘호환’(虎患)을 당한다고 사육사 아저씨들이 겁을 줬기 때문이지요.
.
요즘은 호랑이 곁에서 잘도 찍던데 당시만 해도 사육사 아저씨들은 호랑이 곁에 가는 걸 굳게 막아섰습니다. 호기심은 많은 편이지만 겁도 그만큼 많아서 저도 굳이 그 만류를 뿌리치지는 않았습니다.
.
그래도 상대적으로 가까이에서 호랑이를 관찰할 수는 있었죠. 보통 동물을 가까이에서 대하면 그 실제 모습에 일단 압도될 때가 많습니다. 기린을 옆에서 한 번 보면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목뼈 통증을 실제로 느끼게 되고 하마가 입 벌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면 무슨 식칼 두 배쯤 되는 그 송곳니에 경악하게 되죠. 코끼리가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면 촬영이고 뭐고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지축을 울린다’는 그 느낌은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죠. 호랑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
유리창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찍는데 호랑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습니다. 타는 듯 붉은 혓바닥과 그를 위아래에서 호위하는 듯 내리치고 올라간 송곳니 두 쌍을 보자니 으슥한 산길에서 저 괴물을 마주쳤 때 느낌이 어땠을지 짐작이 오더군요.
.
생전 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호랑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만주에서 살 땐데.... 나물을 캐는데 언덕 아래에서 사람들이 뭐라뭐라 난리를 치더구나. 나는 그저 내려왔는데 내 바로 위 바위에서 호랑이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대. 그런데 그걸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 중 하나가 오줌을 쌌다더구나. 호랑이하고 눈이 마주쳤대.” 까마득히 멀리서 눈 마주친 사람이 오줌을 지리게 하는 공포.
.
그러니 다 큰 호랑이에게 접근할 수는 없었지만 사육사 아저씨들은 저를 위해 새끼 호랑이들을 두 마리 데리고 왔습니다. 아직 우유를 먹고 있고 막 고깃덩이를 다져서 먹이기 시작했다는 고양이만한 호랑이 새끼들.
.
새끼 때 예쁘지 않은 동물은 결혼식 날 예쁘지 않은 신부보다 드물 겁니다. 동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저지만 호랑이 새끼들은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귀여웠습니다. 와아 귀여워라...... 한번만 안아 보겠다고 안긴 했는데 불안해 하는 것 같아 바로 사육사 아저씨에게 건네 드렸지만, 우유라도 한 통 먹이며 품에 안고 싶을 만큼 앙징맞았죠.
.
이 호랑이들이 아장아장 걷는 건 더 깜찍했습니다. 조심조심 걸음을 하는 아기 호랑이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앉은 채 뒷걸음질을 치며 촬영을 했습니다. 뷰파인더에 얼굴을 박고 키득거리면서 카메라 렌즈를 신기한 듯 따라오는 아기 호랑이를 바라보는데 뷰파인더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
아기 호랑이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캬앙 하면서 이빨을 드러내는 게 보인 겁니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자 신경질을 내나 싶어 저도 순간 무릎을 일으켰습니다. 그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
갑자기 고양이만한 아기 호랑이가 점프를 하더니 제 허벅지를 할퀴어 버린 겁니다. 옷이 다 찢겨 나가고 허벅지에 할퀸 자국이 깊이 날만큼 날렵하고도 강력한 공격이었습니다. 1초 전처럼 뷰파인더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면 호랑이 발톱은 제 뺨을 향했을 겁니다. 만약 그랬으면 오늘날의 등촌현빈은 스카페이스가 돼 있겠죠 . 아기 호랑이에게 찢긴 바지는 당연히 버려야 할 만큼 너덜너덜했구요.
.
임인년을 맞아 호랑이 얘기를 해 보자는 얘기를 듣고 호랑이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자니 단연 그날의 아기 호랑이가 원톱으로 등장합니다. 한없이 귀여웠던, 그러나 호랑이는 호랑이구나 하는 소리가 100번은 되풀이 재생되게 만들었던 그날의 아기 호랑이 말입니다.
.
물론 카메라를 앞에 대고 살살 뒷걸음치며 아기 호랑이의 부아를 치밀게 한 댓가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외양은 변화할 수 있으나 변하지 않는 본성이 있고, 외양 때문에 본성을 도외시했다가는 큰코를 다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줬던 아기 호랑이의 점프였습니다. 하긴 어디 호랑이만 그러겠습니까. 사람도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