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의 한국인, 문혜림 여사의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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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모임’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던 외국인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7~80년대 한국의 어두웠던 시기, 한국의 폭압적 현실과 민주화운동의 진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애쓴 사람들이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의 독일 기자 한스 힌츠페터에게 광주 소식을 전달한 것도 월요모임이었다. 도꾜에 있던 독일인 목사 폴 슈나이츠가 월요모임의 전갈을 듣고 같은 나라 기자 힌츠페터에게 연결시켰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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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당연히 한국 정부의 감시를 받았고 마치 첩보전을 수행하듯 움직이며 한국의 소식을 바깥에 전했다. “서대문에서 만나자고 하면 동대문에서 만나는 식” (JTBC 2019년 5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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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통신 수단의 검열이 가능했던 시절, 월요모임의 소식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부분을 담당한 것이 미국 출신의 페이 문, 문혜림 여사였다. 문동환 목사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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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민주화운동으로 툭하면 감옥에 들어가던 시절, 문혜림 여사는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했고 미군 부대의 해외 우편을 활용해 월요모임 소식을 해외에 전했다. 천하의 중앙정보부도 미군의 우편을 검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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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 문, 본명 헤리엇 페이 핀치백은 1961년 미국 유학 중이던 열 다섯 연상의 한국 남자 문동환과 결혼한다. 그렇게 ‘미세스 문’이 된 미국인 헤리엇 페이에게 문동환 목사는 ‘혜림’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문혜림 여사는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문씨 집안 며느리로, 목사이자 민주화 운동가의 아내로 살아가게 된다. 한복을 입고 ‘형님네’(문익환 목사 가족)와 어울리며 우리 말을 배우며 한국인처럼 살아가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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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국인 문혜림이 된 그녀는 민주화운동에 나선 남편의 든든한 동지이자 화려한 주역이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좁은땅에서 벌어지는 정치세력들간의 각축관계가 아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키는 일로 인식하고 그것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능력이 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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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1 구국 선언으로 남편을 비롯한 여럿이 구속된 상황에서 공개 재판이 거부되자 문혜림 여사는 망연자실한 가족들 앞에 나가 외친다. “방청권을 불살라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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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그녀는 다른 부인들과 함께 시각적으로 훌륭한 ‘이벤트’들을 생산해 냈다. “입에 검은 테이프를 십자가 모양으로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민주회복’ 등의 구호를 적은 양산(파라솔)을 펼쳐 시위를 하기도 했다......한번은 보라색 원피스에 아예 재봉틀로 커다란 십자가를 박아 입고 나서서는 외투를 한순간에 벗어 보이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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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림 여사의 삶은 민주화 운동가에 그치지 않는다.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잇기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그녀의 눈에 기막힌 풍경이 들어왔다. 미군 전용 클럽에서 미군들을 상대했던 한국 여성들의 피맺히게 억울한 모습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문혜림 여사는 그들을 돕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두소할 데가 없다는 걸 깨닫고 그는 그런 여성들을 돕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1986년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조직 ‘두레방’이 문을 연 것은 그 노력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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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의 위안부 동원을 비난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군들을 위한 위안부 시설을 운용했다. 그리고 기지촌 근처의 여성들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투명인간처럼 외면했다. 두레방은 오랫 동안 외국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토종 한국인들도, 한국 정부도 짐짓 외면했던 기지촌 여성들을 향하여 벽안의 한국인 문혜림은 거침없이, 스스럼없이 나아갔다. 그 딸 문영미씨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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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면 두 눈을 반짝이며 두레방에서 만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곤 했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어머니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정말로 편견이 없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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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남편 문동환 목사를 앞서 보낸 뒤 문혜림 여사는 미국에 머물고 있는 자식들의 간곡한 청에 따라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출국을 앞두고 문혜림 여사는 두레방 상담소장 등 두레방 식구들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과 함께 문혜림 여사는 생전에 남편이 좋아했던 찬송가 몇 곡을 부르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노래 ‘지금까지 지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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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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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노래는 돌아간 문동환 목사와 2022년 3월 11일 세상을 뜬 문혜림 여사의 일생이 담긴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을 시작하고, 더 큰 사랑과 섬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던 문혜림 여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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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젊은 세대에게는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가 되겠지만, 오늘의 우리를, 우리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피눈물과 땀방울이 이 땅에 뿌려진 것만큼은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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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이 아니라 그들의 때를 위하여. 그리고 그 치열했던 사람들의 자랑찬 후배들이 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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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림 여사의 일생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봤습니다. 위 내용에 없는 이야기들도 가미돼 있으니 한 번 보시고 구독도 꾸욱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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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다 선거다 경황없는 사이 소홀해진 유튜브 영상에도 다시 부지런해져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 댓글로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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