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롯데월드타워에서 진행했던 남한산성 시사회에 다녀왔다. 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고증이나 작중에서 나왔던 부가적인 장치들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먼저 고증은 크게 인물 고증, 사물 고증으로 나뉘게 되는데, 인물 고증은 실제 역사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소설 남한산성의 내용에 충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박희순이 연기했던 이시백은 본래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었으며, 김상헌이 자살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는 내용은 실제로도 나오지만 자결을 해서 죽었다는 설정은 각색된 것이다.
한편 사물 고증은 그동안 한국 사극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줬다. 이시백의 명나라식 투구와 두정갑, 병사들의 지갑(종이로 만든 갑옷)이나 조총 탄약이 든 죽관을 두른 모습은 당시 시대를 매우 잘 반영한 복장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청나라군의 복장도 팔기군 갑옷을 그대로 본 뜬 장면이 나오는 등 사물 고증에 많이 신경 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고증 외에도 눈에 띄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OST가 예사롭지 않아서 관람 뒤 찾아보니 역시 류이치 사카모토가 만든 음악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류이치 사카모토는 영화 마지막 황제의 ‘rain’을 작곡한 뛰어난 음악가이다. 그가 만든 ‘rain’은 아직까지도 각종 광고나 예능에 쓰일 만큼 널리 사랑받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이런 그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어 극중의 분위기를 한 층 깊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1.최명길과 김상헌. 실리냐 명분이냐, 삶이냐 죽음이냐
영화 남한산성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최명길과 김상헌의 설전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설전이 흘러가는 방향이다. 극중에서 연출자는 최명길과 김상헌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저 있는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관객의 판단에 맡기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는 최근 수작으로 평가받는 여러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트렌드와 비슷한 흐름이라 볼 수 있다. 이 기법을 극단적으로 따른 작품이 올해 유명했던 놀란의 작품 ‘덩케르크’였다. 점점 민족주의 같은 특정 사상이나 특정 인물의 편 들기 방식을 입힌 작품은 좋은 작품으로 취급을 못 받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감독의 이러한 연출방식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작품은 최명길이 구국의 영웅이요, 김상헌은 천하의 수구꼴통이라는 이분법적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 시대상황 안에서 여러 인간군상이 맞부딪히는 모습만을 묵묵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러다보니 인물에 대한 주관적 비판보다는 ‘실리냐 명분이냐, 삶이냐 죽음이냐’의 가치관 충돌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설전은 바로 이런 두 가치관의 충돌이 외면적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누가 옳고 그르냐는 철저히 배제된다. 오히려 시대적 상황을 제거하고 보면 각각의 두 신하가 뱉어내는 철학 그 자체는 어느 누가 잘못한 것 없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2.인간으로서의 인조와 왕으로서의 인조
그럼 이 가치관의 충돌 사이에서 누군가는 최대한 효율적이고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전근대에서는 이 역할을 당연히 왕이 수행했으니,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은 그 유명한 인조였다. 영화 속의 인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 속의 인조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을 보인다. 그리 현명한 왕으로 나오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는 그 암군 중의 암군 멍청한 왕 인조로 나오지도 않는다.
영화는 인조의 이러한 낮지도 높지도 않은 왕으로서의 능력치를 충분히 보여준 뒤, 극 후반부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의 인조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미 관객들은 극중의 인조가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은 인물임을 알기에 이 역사의 결말을 알면서도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감정이입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결정을 내릴 당시에 성 안의 병사들과 말은 추위와 굶주림의 극한에 내몰려 있는 상황이었으며, 청군은 칸의 등장으로 남한산성을 더욱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청군이 비록 융성하였으나 청이 아직 명나라의 산해관도 뚫지 못한 시점이었고, 국내정세는 인조라는 사람이 반정으로 왕 위에 오른 사람이라 명을 따라야한다는 명분을 쉽게 버릴 수도 없는 시기였다. 그러니 몇 백 년 지난 지금에서 볼 때야 쉬운 문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최명길과 김상헌을 필두로 대소신료들의 설전이 극에 달하고 있다면?
정말 한 인간으로서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결국 그는 중요한 순간에 왕으로서 결정적인 오판을 거듭해서 삼전도의 굴욕을 자초하게 됐지만, 인간 인조의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을 비추어 보았을 때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광해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지만 그도 인목대비 폐위문제, 무리한 궁궐 공사, 내정의 소홀함으로 뚜렷한 단점 또한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바로 그런 연유 때문에 인조반정이 실패에 그치지 않고 성공한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는 평시에 광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찮은 내정관리를 해나간다. 문제는 반정의 정통성이 중종 때와 비교해 너무 약했다는 것과 그 자신이 왕으로서 인재를 보는 눈이 너무 없었다는 것에 있다. 이런 패널티는 대내외적으로 그가 결정적인 순간 눈치를 지속적으로 보게 되게끔 만들었으며 적재적소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할 인재들이 삽질을 연발하게 되어 전쟁을 더욱 참혹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당시 요직에 앉아 있는 인재목록을 훑어보면 그가 얼마나 인재관리능력이 형편없었는가에 대한 것이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있었을 때의 인간 인조의 선택은 명청교체기의 중심에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해야하는 한 인간으로서 매우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것은 어쩌면 제도적으로 볼 때 혈통에 따른 왕이 모든 중대사를 최종적으로 결제하는 중앙집권체제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3.‘저는 전하의 명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 잘해서 한 해 배불리 보내는 게 소인의 꿈이옵니다.’
영화 안에서 작품의 다양성을 불어넣는 존재 중 하나가 바로 고수가 연기한 대장장이 서날쇠
다. 영화는 서날쇠를 통해 당시 민초들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꾸준히 조명한다. 그중에서 민초들의 의중을 한 마디로 잘 나타낸 것은 서날쇠가 김상헌이 전해주는 왕의 격서를 받아 들 때 했던 고수의 대사다.
‘저는 전하의 명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 잘해서 한 해 배불리 보내는 게 소인의 꿈이옵니다.’
극중 고수의 이 대사는 최명길이 설전 중에 했던 여러 발언들과 오버랩되면서 극의 감성을 한 층 깊게 만들어 준다. 삶이 있은 다음에야 새 길이 있을 것이고,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임금만이 비로소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일 것이다. 당장 생존의 갈림길 아래에 있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명분이 무슨 소용일까. 눈이 녹고 민들레꽃이 피는 날, 꺽지 한 마리 낚아서 상에 내 놓으면 그것이 곧 행복인데 말이다.
4.겨울은 가고 민들레꽃은 다시 핀다.
마침내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항복을 준비하는 인조. 최명길과 김상헌은 처마 아래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이판(최명길)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었고 나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김상헌. 그런 김상헌의 말에 최명길은 이 일이 이렇게 된 것에 어찌 예판(김상헌)의 잘못만 있겠냐며 자신의 잘못도 분명 있다면서 같이 힘을 내어 조정의 재건에 힘쓰자고 말한다.
그러나 김상헌은 자신이 전쟁동안 느낀 것은 이 나라가 바뀌려면 자네와 나, 심지어 임금까지 없어져야한다는 것이라며 한사코 그 제안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그대로 행동에 옮겨 극중에서 자결하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한편 인조는 최명길의 항복문서를 바탕으로 삼전도로 향하여 청의 황제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한다. 한 번 머리를 바닥에 댈 때마다 이마에 흙이 진하게 묻는 인조의 모습이 참 상징적이면서도 인상적이다. 최명길은 그런 인조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유난히 추웠던 병자년의 전쟁이 막을 내리고 민들레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남한산성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비춰진다.
영화 속의 결말은 김상헌이 서날쇠에게 맡기고 간 여자아이 ‘나루’가 여느 일상처럼 친구들과 연 날리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장장이 일을 하는 서날쇠의 모습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결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전체에서 틈틈이 던져주었던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며, 지극히 이 영화다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전부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겨울이 가면 여느 때처럼 민들레꽃이 피는 봄은 다시 온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주는 잔잔하고 묵직한 메시지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