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상태(인간의 조건)] 2부 5장. 폴리스 및 하우스홀드(가정경제; 가구;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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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폴리스 및 하우스홀드(가정경제; 가구; 가계)The Polis and the Household

정치적인 권역과 사회적인 권역을 동일정체시하기 및 잘못이해하기는... 사회의 근대적인 쓰임새 및 근대적인 이해하기 안에서 더욱 헤깔리기에 이르렀다. 고대 도시국가가 출현한 뒤부터 공적인 권역(폴리스)과 사적인 권역(가계) 사이의 구별은 적어도 실체들로써 분리되었었다. 그러나 사적이지도 않고 공적이지도 않은, 사회적인 권역의 출현은 새로운 현상으로써, 근대적인 시대의 출현과 그 기원이 일치할 뿐 아니라, 그것의 정치적인 형태는 국민국가이다(98)Although misunderstanding and equating the political and social realms is as old as the translation of Greek terms into Latin and their adaption to Roman-Christian thought, it has become even more confusing in modern usage and modern understanding of society. The distinction between a private and a public sphere of life corresponds to the household and the political realms, which have existed as distinct, separate entities at least since the rise of the ancient city-state; but the emergence of the social realm, which is neither private nor public, strictly speaking, is a relatively new phenomenon whose origin coincided with the emergence of the modern age and which found its political form in the nation-state.

(사회적인 권역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현상 탓에) '공적인 권역'과 '사적인 권역' 사이의 결단적인 분할을, '폴리스의 스피어'와 '하우스홀드, 가문의 스피어' 사이의 결단적인 분할을, 그리고 마침내는 '어떤 공통세계에 관계된 활동들(행동하기)'과 '생명삶의 유지에 관계된 거시기들(노동하기 및 작업하기)' 사이의 결단적인 분할을, 이해하는 데에 비상한 어려움이 야기되었다. 이것들은 고대의 정치적인 모든 생각들이 스스로-증거삼았던 그리고 공통원리로 여겼던 어떤 분할이었다. (이제 근대의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분할선이 전반적으로 흐릿해졌는데, 왜냐하면 인민들의 몸체 및 정치적인 커뮤니티들을 우리가 어떤 가문의 이미지 안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를) 그것의 나날의 일들이 거대하고 범국민적인 어떤 하우스키핑(가정관리경영)과 같은 행정에 의해서 보살핌받는 어떤 가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개발된 과학적 생각은 더 이상 전혀결코 정치과학이라 볼 수 없는, "국민경제" 또는 "사회적인 경제" 또는 "민족경제"이고, 이들 모두는 "집단적인 하우스키핑(가정관리경영)"의 어떤 종류를 가리킬 뿐이다; 하나의 초-인간적인 가문의 복사물 안을향해 경제적으로 조직되어진 가문들의 집합체를 우리는 "사회"라고 부르는 바이고, 그리고 그것의 조직형태는 "국민"이라고 불리운다. 고대인들은 종의 생존 및 인디비두얼의 생명삶과 관련된 것들은 여하하든지간에 "경제적"이라고 불렀는데, 그것들은 규정에 의해서 비-정치적인 하우스홀드 일들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99)What concerns us in this context is the extraordinary difficulty with which we, because of this development, understand the decisive division between the public and private realms, between the sphere of the polis and the sphere of household and family, and, finally, between activities related to a common world and those related to the maintenance of life, a division upon which all ancient political thought rested as self-evident and axiomatic. In our understanding, the dividing line is entirely blurred, because we see the body of peoples and political communities in the image of a family whose everyday affairs have to be taken care of by a gigantic, nation-wide administration of housekeeping. The scientific thought that corresponds to this development is no longer political science but "national economy" or "social economy" or Volkswirtschaft, all of which indicate a kind of "collective housekeeping"원주13 the collective of families economically organized into the facsimile of one super-human family is what we call "society," and its political form of organization is called "nation."원주14 We therefore find it difficult to realize that according to ancient thought on these matters, the very term "political economy" would have been a contradiction in terms: whatever was "economic," related to the life of the individual and the survival of the species, was a non-political, household affair by definition.

원주13. 군나르 뮈르달에 따르자면, 사회적인 경제 또는 집단적 가정관리경영(민족경제)의 이념은, 바로 그 시작에서부터 경제학에 스며들었던 정치적인 헛된생각이, 써그것을 둘러싸고 결정화되어졌던 "3개의 주된 초점들" 가운데 하나이다(99)According to Gunnar Myrdal(The Political Element in the Development of Economic Theory [1953], p. xl), the "idea of Social Economy or collective housekeeping(Volksivirtschaft)" is one of the "three main foci" around which "the political speculation which has permeated economics from the very beginning is found to be crystallized."

원주14. 국민국가와 그것의 사회가, 써그것의 프레임워크 안에서 가문과 하우스홀드 단위가 고전고대에 비할 바없이 중요했던, 중세 왕국 및 봉건주의로부터 자라나왔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분명하다. 봉건적인 프레임워크 안에서는 가문들과 하우스홀드들은 상호적으로 거의 독립적이었다, 그결과 (중세) 궁정의 하우스홀드는 (나중에 절대왕정의 국왕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의 가문의 우두머리인 냥 허세떨지 않았다. 중세의 "국민"은 가문들의 콩글로머레이션(허술한 덩이)이었다; 그것의 구성원들은 전일적인 어떤 국민을 포괄하는 하나의 가문의 구성원들로써 생각지 않았다(99)This is not to deny that the nation-state and its society grew out of the medieval kingdom and feudalism, in whose framework the family and household unit have an importance unequalled in classical antiquity. The difference, however, is marked. Within the feudal framework, families and households were mutually almost independent, so that the royal household, representing a given territorial region and ruling the feudal lords as primus inter pares, did not pretend, like an absolute ruler, to be the head of one family. The medieval "nation" was a conglomeration of families; its members did not think of themselves as members of one family comprehending the whole nation.

역사적으로 가문과 하우스홀드의 사적인 권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도시국가와 공적인 권역이 일어났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화덕(가정)의 오래된 신성의무가 전반적으로 사라진 적은 결코 없다(100)Historically, it is very likely that the rise of the city-state and the public realm occurred at the expense of the private realm of family and household. Yet the old sanctity of the hearth, though much less pronounced in classical Greece than in ancient Rome, was never entirely lost.

하우스홀드 스피어(가정관리경영의 장)의 구별되는 형질은 그 안에서 사람들은 함께 살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바램들 및 욕구들에 의해서 추동되었기 때문이다. 추동하는 강제력은 생명삶 그자체였다... 하우스홀드 안에서의 본성자연적 공동체는 따라서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으로 태어났고, 그것 안에서 수행되는 모든 활동들은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에 의해 지배받았다(101)The distinctive trait of the household sphere was that in it men lived together because they were driven by their wants and needs. The driving force was life itself— the penates, the household gods, were, according to Plutarch, "the gods who make us live and nourish our body"19— which, for its individual maintenance and its survival as the life of the species needs the company of others. That individual maintenance should be the task of the man and species survival the task of the woman was obvious, and both of these natural functions, the labor of man to provide nourishment and the labor of the woman in giving birth, were subject to the same urgency of life. Natural community in the household therefore was born of necessity, and necessity ruled over all activities performed in it.

이와 반대로, (고대도시국가 안에서) 폴리스의 권역은 프리덤의 스피어이다... 하우스홀드 안에서의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들을 마스터하는 것은 폴리스의 프리덤를 위한 조건상태였다. (그러나 고대 다음부터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상황 아래서도 정치는 사회를 보호하는 유일한 어떤 수단자산일 수 없게 된다.... 중세의 신앙사회, 홉스의 쉼없이 획득에 참여하는 어떤 사회, 로크의 프로퍼티-오너들의 어떤 사회, 맑스의 생산자들의 어떤 사회, 지금 우리의 일자리가진이들의 어떤 사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나라들의 노동자들의 어떤 사회, 모든 이러한 경우들 안에서, 정치적인 권한권위의 제약을 요청하고 떳떳케하는 것, 그것은 (더이상 폴리스가 아니라) 사회의 프리덤이다. (이제 고대와 달리) 프리덤은 사회적인것들의 권역 안에 장소잡는다, 그리고 강제력 또는 폭력이 정부통치의 독점물이 된다(101)The realm of the polis, on the contrary, was the sphere of freedom, and if there was a relationship between these two spheres, it was a matter of course that the mastering of the necessities of life in the household was the condition for freedom of the polis. Under no circumstances could politics be only a means to protect society — a society of the faithful, as in the Middle Ages, or a society of property-owners, as in Locke, or a society relentlessly engaged in a process of acquisition, as in Hobbes, or a society of producers, as in Marx, or a society of jobholders, as in our own society, or a society of laborers, as in socialist and communist countries. In all these cases, it is the freedom(and in some instances so-called freedom) of society which requires and justifies the restraint of political authority. Freedom is located in the realm of the social, and force or violence becomes the monopoly of government.

폴리스 생명삶에 대해서 얼마나 대립했던 간에,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은 프리덤이 배타적으로 정치적인 권역 안에 장소한다는 것 만큼은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그들은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은 1차적으로 앞-정치적인 어떤 현상, 곧 사적인 하우스홀드 조직체의 특징이라는 점, 그리고 강제력과 폭력은 이러한 스피어 안에서,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노예들을 지배함에 의해서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을 마스터하기 위한 그래서 자유롭기 위한 유일한 수단자산이기 때문에, 떳떳해진다는 점에 그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존재들이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존재들은 타자들을 폭력할 자격을 가진다; 폭력은 세계의 프리덤을 위한 생명삶에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해주는 앞-정치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프리덤은 그리스인들이, 웰쓰와 건강이 종속된 객관적인 어떤 신분지위인, 에우다이모니아(행복)이라고 부른 것의 본질적인 조건상태이다. 가난하거나 아프다는 것은 물리적인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 아래 예속당함을 의미했고, 더해서, 노예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만든 폭력에 예속됨을 의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많은 하우스홀드 노예들의 쉬운 생명삶보다 선호했다(101~102)What all Greek philosophers, no matter how opposed to polis life, took for granted is that freedom is exclusively located in the political realm, that necessity is primarily a prepolitical phenomenon, characteristic of the private household organization, and that force and violence are justified in this sphere because they are the only means to master necessity— for instance, by ruling over slaves— and to become free. Because all human beings are subject to necessity, they are entitled to violence toward others; violence is the prepolitical act of liberating oneself from the necessity of life for the freedom of world. This freedom is the essential condition of what the Greeks called felicity, eudaimmla, which was an objective status depending first of all upon wealth and health. To be poor or to be in ill health meant to be subject to physical necessity, and to be a slave meant to be subject, in addition, to manmade violence. This twofold and doubled "unhappiness" of slavery is quite independent of the actual subjective well-being of the slave. Thus, a poor free man preferred the insecurity of a daily-changing labor market to regular assured work, which, because it restricted his freedom to do as he pleased every day, was already felt to be servitude(douleia), and even harsh, painful labor was preferred to the easy life of many household slaves.20

하지만 앞-정치적인 강제력은... 17세기 (홉스의) 정치적인 생각의 "본성자연의 상태신분"과는 공통된 전혀아무런 거시기가 없다. 정반대로 정부통치 및 권력... 정상화된 질서명령에 대한 우리의 센스는... 공적인 스피어보다는 사적인 스피어에 속하는 것, 곧 앞-정치적인것들로 이해한다(102)The prepolitical force, however, with which the head of the household ruled over the family and its slaves and which was felt to be necessary because man is a "social" before he is a "political animal,"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chaotic "state of nature" from whose violence, according to seventeenth-century political thought, men could escape only by establishing a government that, through a monopoly of power and of violence, would abolish the "war of all against all" by "keeping them all in awe."원주21 On the contrary, the whole concept of rule and being ruled, of government and power in the sense in which we understand them as well as the regulated order attending them, was felt to be prepolitical and to belong in the private rather than the public sphere.

원주21. 홉스 [리바이어던] 1부, 13장The reference is to Hobbes, Leviathan, Part I, ch. 13.

하우스홀드는 가장 엄격하게 불평등했다... 폴리스는 오직 "평등하다"는 점에서 하우스홀드와 구별되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생명삶의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에 예속되지않음과 타자들을 지휘명령에 예속시키지않음 그리고 지휘명령 그자체에 예속되지 않음, 둘다를 의미했다. 프리덤은 지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배받지않음을 의미했다... 확실히 이런 정치적인 권역의 평등함은 (오늘날) 우리의 평등의 개념과는 공통된것들이 거의 없다: 그것은 자신과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살고 이 사람들하고만 관계맺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도시국가의 뭇쪽수들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불평등한이들"의 실존을 앞서헤아린다. 그러므로 근대와 달리 평등은 저스티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것이 프리덤의 본질이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지배자됨 안에 현전하는 불평등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의미했고, 그리고 지배도 지배당함도 실존하지않는 어떤 스피어로 이동함을 의미했다(103)The polis was distinguished from the household in that it knew only "equals," whereas the household was the center of the strictest inequality. To be free meant both not to be subject to the necessity of life or to the command of another and not to be in command oneself. It meant neither to rule nor to be ruled.원주22 Thus within the realm of the household, freedom did not exist, for the household head, its ruler, was considered to be free only in so far as he had the power to leave the household and enter the political realm, where all were equals. To be sure, this equality of the political realm has very little in common with our concept of equality: it meant to live among and to have to deal only with one's peers, and it presupposed the existence of "unequals" who, as a matter of fact, were always the majority of the population in a city-state.원주23 Equality, therefore, far from being connected with justice, as in modern times, was the very essence of freedom: to be free meant to be free from the inequality present in rulership and to move in a sphere where neither rule nor being ruled existed.

원주22. 헤로도투스 안에서 정부통치의 다른 형태들을 토론하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참조는 그리스적인 평등(이소노미에)의 방어자인 오타네스가 "나는 지배함도 바라지 않고 지배받음도 바라지 않는다"라고 진술하는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횡자에게는 프리덤이 없다고 하면서, 자유로운 어떤 사람의 생명삶이 어떤 전횡자의 그것보다 더낫다라고 진술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태도이다. 쿨랑주에 따르자면, 렉스, 파테르, 아낙스, 바실레우스와 같은 그러한 그리스 및 라틴 낱말들은 기원적으로 하우스홀드의 관계됨 곧 노예들이 자신들의 주인에게 바쳤던 이름들이다(103)The most famous and the most beautiful reference is the discussion of the different forms of government in Herodotus(iii. 80-83), where Otanes, the defender of Greek equality(isonomie), states that he "wishes neither to rule nor to be ruled." But it is the same spirit in which Aristotle states that the life of a free man is better than that of a despot, denying freedom to the despot as a matter of course(Politics 1325a24). According to Coulanges, all Greek and Latin words which express some rulership over others, such as rex, pater, anax, basileus, refer originally to household relationships and were names the slaves gave to their master(op. cit., pp. 89 ff., 228).

● 여기 아렌트 [인간조건상태]의 2부 5장, 103쪽의 바로 이 글토막이 핵심이군요. 페팃의 "프리덤 애즈 넌-도미네이션" 개념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퀜틴 스키너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에 나오는 공화주의적인 프리덤이기도 하구요. 역시 또한 이러한 그리스적인 평등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 [철학의 기원]에서 주장한 이소노미아의 원천이기도 하구요. 따라서 이 글토막은 페팃의 넌도미네이션으로서의 프리덤, 스키너의 공화주의적 프리덤, 고진의 이소노미아. 이 세 개념의 원천이 되네요. 아렌트의 통찰이 뒷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제사례입니다.

하지만, 정치에 관한 고대적인 이해하기와 근대적인 이해하기 사이의 심원한 차이를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서 끝난다. 근대세계안에서 사회적인 권역과 정치적인 권역은 훨씬 덜 구별된다. 정치는 이제 사회의 어떤 기능에 지나지 않고, 행동, 발언(로고스) 그리고 생각은 1차적으로 사회적인 인터레스트 쪽위로의 상부구조이다... 정치의 이러한 기능화... 사회의 일어남, 곧 하우스홀드(오이키아)의 일어남 또는 공적인 권역을 향한 경제적인 활동들의 일어남... 하우스키핑(가정관리경영) 및 이전에 가문의 사적인 스피어에 딸린 모든 문제꺼리들이 "집합적인' 어떤 관심꺼리가 됨... 두 개의 권역들(사적인 하우스홀드 및 공적인 폴리스)이 (사회적인 권역 안에서) 생명삶의 과정 그자체의 멈추지않는 개울들 안에서의 파도들처럼 각각 서로의 안을향해 항상적으로 뒤섞인다(104)However, the possibility of describing the profound difference between the modern and the ancient understanding of politics in terms of a clear-cut opposition ends here. In the modern world, the social and the political realms are much less distinct. That politics is nothing but a function of society, that action, speech, and thought are primarily superstructures upon social interest, is not a discovery of Karl Marx but on the contrary is among the axiomatic assumptions Marx accepted uncritically from the political economists of the modern age. This functionalization makes it impossible to perceive any serious gulf between the two realms; and this is not a matter of a theory or an ideology, since with the rise of society, that is, the rise of the "household"(oikia) or of economic activities to the public realm, housekeeping and all matters pertaining formerly to the private sphere of the family have become a "collective" concern.원주24 In the modern world, the two realms indeed constantly flow into each other like waves in the never-resting stream of the life process itself.

원주24. 뮈르달의 앞책을 보라. "어떤 가문의 우두머리처럼, 사회는 자신의 구성원들인 집들을 하우스키핑해야 한다는 개념이 경제학 용어학 안에 깊이 뿌리내려있다. 독일어 안에서 볼크비르샤프트레흐르(국민경제학)라는 용어는... 공통된 어떤 퍼포즈 및 공통된 가치들을 지닌, 경제적인 활동의 집합적인 어떤 주체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영어 안에서 웰쓰의 이론 및 웰페어의 이론 역시 비슷 이념들을 표현한다." "써그것의 기능이 사회적인 하우스키핑인 사회적인 어떤 경제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그것은 그의 가진바의 하우스홀드 및 그의 가문의 하우스홀드를 관리경영하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어떤 유추를 암시하거나 제시한다. 아담 스미스 및 제임스 밀은 이러한 유비를 명시적으로 설명한다. 존 밀의 비판 뒤에야, 그리고 실천적인 정치경제학과 이론적인 정치경제학 사이의 구별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생긴 뒤에야, 이러한 유추는 훨씬 덜 강조되었다." 유추가 더 이상 쓸모없게된 까닭은, 사회가 가문이라는 단위를 집어삼켜서, 사회가 (가문 대신에) 어엿한 대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104)See Myrdal, op. cit.; "The notion that society, like the head of a family, keeps house for its members, is deeply rooted in economic terminology. ... In German Volksiwirtschaftshhre suggests... that there is a collective subject of economic activity... with a common purpose and common values. In English, ... 'theory of wealth' or 'theory of welfare' express similar ideas"(p. 140). "What is meant by a social economy whose function is social housekeeping? In the first place, it implies or suggests an analogy between the individual who runs his own or his family household and society. Adam Smith and James Mill elaborated this analogy explicitly. After J. S. Mill's criticism, and with the wider recognition of the distinction between practical and theoretical political economy, the analogy was generally less emphasized"(p. 143). The fact that the analogy was no longer used may also be due to a development in which society devoured the family unit until it became a full-fledged substitute for it.

● 아렌트의 [인간조건상태]는 단순한 정치학이 아니라, 우리가 공부하게될 <시즌4 경제학>을 위해서도 무척 중요한 통찰을 나에게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가, 정치학이 곧 경제학이고, 경제학이 곧 정치학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네요. 사회적인것들의 일어남이, 사적인것들과 공적인것들의 고전고대적 구별을 허물어 버렸다는 사실, 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프라이빗(사)의 성격이 바뀐 것이지요. 전근대의 프리바투스(사)가 "결여된자, 빼앗긴자"였던 점, 전근대의 서브젝트가 "백성, 신민, 예속"이었던 점,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프리바투스(사)는 "프로퍼티, 라이트, 프리덤, 프라이버시"가 된 점, 서브젝트는 "주체"가 된 점. 이렇듯이, 프라이빗(사)의 성격이 확연하게 트랜스포메이션됩니다. 마찬가지로 전근대의 푸블리쿠스(폴리스)가 "공민"이었던 점, 그러므로 고전고대적인 프리덤이 단지 폴리스의 프리덤이었던 점, 그리고 하우스홀드(패밀리) 및 사적인 권역의 노예들에 대한 폭력이라는 불평등함을 이 푸블리쿠스(폴리스)가 가부장들에게 허용했던 점.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푸블리쿠스(공)는 프라이빗(사)의 수단자산으로 지위가 전락하고, 퍼블릭(공)은 소사이어티의 부분으로 지위가 하락합니다. (로크의 2단계 게약론이 이것을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내 새끼, 내 마누라, 내 집안 일에 왜 국가가, 경찰이, 공권력이 간섭하냐"라는 발언 속에는, 전근대적인 푸블리쿠스(폴리스)와 프리바투스(하우스홀드의 사) 사이의 구별 또는 불가침 경계가 남아있습니다. 전근대에서는 그렇기에 푸블리쿠스(폴리스)는 하우스홀드(패밀리)라는 사적 권역에 개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는 이러한 발언은 더 이상 용납이 안됩니다. "내 새끼, 내 마누라"가 이제는 하우스홀드(패밀리)의 가부장(도미누스, 마스터, 파테르)의 프로퍼티(재산)가 아니라, 그들 각각이 하나의 프라이빗 서브젝트로써 가부장과 대등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전근대에서는 아이, 자식, 마누라, 여성, 노예, 외국인 등등의 프리바투스들은 하우스홀드(패밀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우스홀드(패밀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푸블리쿠스(폴리스)였기 때문에, 이러한 폴리스 안에서 이들은 "결여된 자들, 빼앗긴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근대에는 하우스홀드(패밀리)와 폴리스(푸블리쿠스) 사이에는 전혀아무런 제 3의 스피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대는 다릅니다. 하우스홀드(패밀리)와 폴리스(푸블리쿠스) 사이에 소사이어티가 생긴 덕분입니다. 이제 프리바투스(사)들은 더 이상 하우스홀드(패밀리)에 노예화되지 않아도 됩니다. 프리바투스(사)들은 하우스홀드(패밀리)를 떠나도 됩니다. 패밀리를 떠나면 곧바로 폴리스와 맞딱 뜨려야 했던 전근대와 달리, 이제 하우스홀드(패밀리)를 떠난 프리바투스들 곧 인디비두얼들은 패밀리와 폴리스 사이에, 제 3의 스피어인 소사이어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프리덤을 얻습니다. 게다가 (로크에 따르자면) 소사이어티는 폴리스를 만든 주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사이어티는 인디비두얼들의 집합입니다. 따라서 하우스홀드(패밀리) 경제 vs 폴리스(푸블리쿠스) 정치의 양극화 포메이션 탓으로, 소속할 곳이 없었던 인디비두얼들이 이제 하우스홀드(패밀리) vs 소사이어티 vs 폴리스의 3원구조 덕택에, 정치적= 경제적 프리덤/프로퍼티/라이트/파워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가 가문이라는 단위를 집어삼켜서, 사회가 (가문 대신에) 어엿한 대체물이 되어버림"으로써, 이제 인디비두얼들은 더 이상 파테르, 도미누스, 가부장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대로 소사이어티에서 더잘나가는 사람이 이제는 하우스홀드(패밀리)를 지배하는 정당성과 권력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해서 <퍼블릭 sv 프라이빗의 그레이트 트랜스포메이션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이제 훨씬 더 깨끗하게 그리고 더복잡하게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이 매일같이 하우스홀드의 좁다란 권역을 가로질러 정치의 권역 안을향해 트렌센드해야만 했던 큰구렁이 사라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러한 사적인 권역과 공적인 권역 사이의 큰구렁은, 비록 그 의미심장함을 많이 잃어버리고 그것의 장소 역시 전반적으로 바뀌었음에도, 중세까지도 여전히 실존했다... 봉건주의의 특징은 모든 활동들의 하우스홀드 안을향한 흡수이고, 거기에서 모든 활동들(노동, 작업, 행동)은 오직 사적인 의미심장함만을 갖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공적인 어떤 권역의 바로 그 없어짐에 있다(105)The disappearance of the gulf that the ancients had to cross daily to transcend the narrow realm of the household and "rise" into the realm of politics is an essentially modern phenomenon. Such a gulf between the private and the public still existed somehow in the Middle Ages, though it had lost much of its significance and changed its location entirely. It has been rightly remarked that after the downfall of the Roman Empire, it was the Catholic Church that offered men a substitute for the citizenship which had formerly been the prerogative of municipal government.25 The medieval tension between the darkness of everyday life and the grandiose splendor attending everything sacred, with the concomitant rise from the secular to the religious, corresponds in many respects to the rise from the private to the public in antiquity. The difference is of course very marked, for no matter how "worldly" the Church became, it was always essentially an otherworldly concern which kept the community of believers together. While one can equate the public with the religious only with some difficulty, the secular realm under the rule of feudalism was indeed in its entirety what the private realm had been in antiquity. Its hallmark was the absorption of all activities into the household sphere, where they had only private significance, and consequently the very absence of a public realm.원주26

원주26. 노동의 봉건적인 조직화가 봉건적인 공동체들의 전일적인 특징이라는 르봐쐬르의 발견은 참이다: 각각은 각자의 집에서 살았고, 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았다. 귀족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 농민은 자신의 경작지 안에서, 그리고 도시인은 자신의 마을에서 살았다(105)The characteristics which E. Levasseur(Histoire des classes ouvrieres et le de Findustrie en France avant 1789 [1900]) finds for the feudal organization of labor are true for the whole of feudal communities: "Chacun vivait chez soi et vivait de soi-meme, le noble sur sa seigneurie, le vilain sur sa culture, le citadin dans saville"(p. 229).

사적인 권역의 이러한 성장은 부수적으로 고대 하우스홀드 우두머리와 봉건영주 사이의 차이를 만들었다... (고대 하우스홀드 우두머리들에게는 폴리스라는 공적인 권역이 있었지만, 봉건영주에게는 그리고 봉건인민들에게는 그러한 공적인 권역은 없었다)... 모든 인간활동들이 사적인 권역 안을향해 데려와졌고, 모든 인간관계됨들이 하우스홀드의 사례로써 모델링되는 것은 특별히 중세적인 프로페셔널 조직체인 길드들 곧 콘프레에리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심지어 콩빠뇽들, 초기 비즈니스 컴패니들까지 올라간다. 컴패니 곧 기원적으로 이어진 하우스홀드들은 이큼느-파니스라는 바로 그 낱말... '하나의 빵을 먹는 사람들', '하나의 빵과 하나의 포도주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러한 글귀들이 가리키는 바이다. "공통된 좋음"이라는 중세적인 개념은 결코 정치적인 어떤 권역의 실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는... 사적인 스피어의 배타성이고... 사적인 인터레스들에서 공적인 의미심장함을 추정하는,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기묘한 하이브리드 권역이 없다는 점이다(105~106)It is characteristic of this growth of the private realm, and incidentally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ancient household head and the feudal lord, that the feudal lord could render justice within the limits of his rule, whereas the ancient household head, while he might exert a milder or harsher rule, knew neither of laws nor justice outside the political realm. The bringing of all human activities into the private realm and the modeling of all human relationships upon the example of the household reached far into the specifically medieval professional organizations in the cities themselves, the guilds, confreries, and compagnons, and even into the early business companies, where "the original joint household would seem to be indicated by the very word 'company' icmnpanis)... [and] such phrases as 'men who eat one bread,' 'men who have one bread and one wine.' " The medieval concept of the "common good," far from indicating the existence of a political realm, recognizes only that private individuals have interests in common, material and spiritual, and that they can retain their privacy and attend to their own business only if one of them takes it upon himself to look out for this common interest. What distinguishes this essentially Christian attitude toward politics from the modern reality is not so much the recognition of a "common good" as the exclusivity of the private sphere and the absence of that curiously hybrid realm where private interests assume public significance that we call "society."

정치적인 권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이든지간에 그의 생명삶의 리스크에 준비되어있어야만 한다. 생명삶을 향한 너무 커다란 사랑은 프리덤에 장애가 되고 이는 동시에 노예스러움에 딱맞는 어떤 기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의 생명삶이라고 부른 "선한 생명삶"이라는 것은 따라서 보통의 생명삶보다 한낱 더낫고, 한낱 더평안하고, 한낱 더고상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와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삶이다. 꾸밈없는 생명삶의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들을 마스터함의 정도, 및 노동과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움의 정도, 그리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모든 살아있는 창조물들의 내적인 충동들을 극복함의 정도, 이러한 정도가 더 이상 생물학적인 생명삶의 과정에 얽매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선한 삶"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107~108)Whoever entered the political realm had first to be ready to risk his life, and too great a love for life obstructed freedom, was a sure sign of slavishness.원주30 Courage therefore became the political virtue par excellence, and only those men who possessed it could be admitted to a fellowship that was political in content and purpose and thereby transcended the mere togetherness imposed on all— -slaves, barbarians, and Greeks alike— through the urgencies of life.31 The "good life," as Aristotle called the life of the citizen, therefore was not merely better, more carefree or nobler than ordinary life, but of an altogether different quality. It was "good" to the extent that by having mastered the necessities of sheer life, by being freed from labor and work, and by overcoming the innate urge of all living creatures for their own survival, it was no longer bound to the biological life process.

원주30. "솔론의 시대에 노예는 죽음보다 더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때 이후 생명삶에 대한 사랑 곧 필로프쉬키아와 비겁함은 노예쓰러움과 동일정체시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노예들의 본성자연적인 노예쓰러움을 증명했다고 믿었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노예들의 불평에 대한 세네카의 대답에서 발견된다. "프리덤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 그러나 거기의 모든 사람들은 아직 노예인가?"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아는 버츄가 없는 사람에게 생명삶은 노예이다"... 노예들은 자살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본성자연적인 노예쓰러움을 입증했다. '용기'가 우월한 정치적인 버추였던 까닭에 그들은 스스로의 본성자연적인 값어치없음, 시민들이 되기에 맞지않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107)"By Solon's time slavery had come to be looked on as worse than death"(Robert Schlaifer, "Greek Theories of Slavery from Homer to Aristotle," Harvard Studies in Classical Philology [1936], XLVII). Since then, philopsychia ("love of life") and cowardice became identified with slavishness. Thus, Plato could believe he had demonstrated the natural slavishness of slaves by the fact that they had not preferred death to enslavement(Republic 386A). A late echo of this might still be found in Seneca's answer to the complaints of slaves: "Is freedom so close at hand, yet is there any one a slave?"(Ep. 77. 14) or in his vita si moriendi virtus ahest, servitus est— "life is slavery without the virtue which knows how to die"(77. 13). To understand the ancient attitude toward slavery, it is not immaterial to remember that the majority of slaves were defeated enemies and that generally only a small percentage were born slaves. And while onder the Roman Republic slaves were, on the whole, drawn from outside the limits of Roman rule, Greek slaves usually were of the same nationality as their masters; they had proved their slavish nature by not committing suicide, and since courage was the political virtue par excellence, they had thereby shown their "natural" unworthiness, their unfitness to be citizens. The attitude toward slaves changed in the Roman Empire, not only because of the influence of Stoicism but because a much greater portion of the slave population were slaves by birth. But even in Rome, lahos is considered to be closely connected with unglorious death by Vergil(Aeneis vi).

원주31. 자유로운 사람은 용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노예와 구별했다는 것이 크레타 시인 휘브리아스의 어떤 시의 테마였다(108)That the free man distinguishes himself from the slave through courage seems to have been the theme of a poem by the Cretan poet Hybrias: "My riches are spear and sword and the beautiful shield.... But those who do not dare to bear spear and sword and the beautiful shield that protects the body fall all down unto their knees with awe and address me as Lord and great King"(quoted from Eduard Meyer, Die Sklaverei im Altertum [1898], p. 22).

● 문득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7부에 서술되었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의 군사적인 버츄들P이 다시 되떠오릅니다. <비르투(사내다움) vs 세르비투스(노예)>의 대립이야말로, 이들 고전고대 그리스로마의 버츄 윤리학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적인 정치적인 의식의 뿌리에서... 오직 생명삶의 과정을 살아있게 하거나 또는 지속가능하게하는 것만을 퍼포즈로 해서 용역하는 전혀아무런 활동(노동, 작업)도 결코 정치적인 권역에 들어오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무역과 수공업을 포기하고, 그것을 이방인과 노예들에게 넘겨주는 무덤을 파는 리스크의 결과, 막스 베버가 생생하게 서술한 바처럼, 아테네는 진실로 "소비자들의 어떤 프롤레타리아"로 이루어진 "펜션폴리스(연금폴리스)"가 되었다(108)At the root of Greek political consciousness we find an unequaled clarity and articulateness in drawing this distinction. No activity that served only the purpose of making a living, of sustaining only the life process, was permitted to enter the political realm, and this at the grave risk of abandoning trade and manufacture to the industriousness of slaves and foreigners, so that Athens indeed became the "pensionopolis" with a "proletariat of consumers" which Max Weber so vividly described.32

하우스홀드(패밀리) 안에서 생명삶에 너쎄시티(필수욕구됨; 먹고사니즘)들을 마스터함없이는 생명삶도 "선한 삶"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치는 결코 (그러한) 생명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폴리스의 구성원인 한, 하우스홀드(패밀리)의 생명삶은 폴리스 안에서의 "선한 삶"을 위해 실존해야만 한다(109)Without mastering the necessities of life in the household, neither life nor the "good life" is possible, but politics is never for the sake of life. As far as the members of the polis are concerned, household life exists for the sake of the "good life" in the po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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