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경석 [스멘트 학파와 기본권 이론] 의 제1장 스멘트통합이론의 역사적 배경, 제1절 스멘트통합이론과 바이마르공화국 안에서
"서유럽 자본주의에 비해 독일에서의 산업혁명은 184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 되고 l87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초기 자본주의의 전형인 영국과 비교하여 독일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과정은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구조의 봉건적 기반이 극히 강고하여 부르조아적 변혁이 장기에 걸치고 또한 파행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봉건제파괴와 자본주의형성이 국가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시민충의 미성숙으로 인해 시민층이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주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독일자본주의의 취약성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1848년의 3월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독일 부르조아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입증하였다.
독일의 미숙한 부르조아는, 1848년의 3월혁명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두에 겁먹고 봉건세력과의 철저한 투쟁을 포기하여 절대주의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외견적 입헌군주제였다. 봉건적 절대주의에 대해서는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유는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 독일 부르조아는, 절대주의와의 타협을 통해 정치적 자유주의를 포기하고 오로지 경제적 자유주의의 추구에 전 계급적 사활을 걸었다.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 라는 독일의 특수성온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한편, 1862년에 프로이센 수상에 취임한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군사력, 독일의 국민주의, 보나파르티즘적 통치기법 둥을 동원하여, 경제적으로는 이미 이루어져 있던 통합을 정치적으로 확보하려고 한 정책은 독일의 산업자본의 형성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1873년의 세계적 대불황을 계기로 독일자본주의는 대외적으로는 자유무역주의를 수정하고 국내적으로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불황을 극 복하려고 하였다. 중공업자본가와 결탁된 대은행가, 농업공황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융커, 이 양자를 중심으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의 옹호와 보호무역을 공통의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연대가 비스마르크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보나파르티즘적 통치 기법은 의회를 통한 부르조아적 진화의 길을 거부하였다. 제국주의적 정책을 추구함 에 있어서 의회와 집행권력의 동질성이 약했기 때문에, 의회를 통한 통치방식보다, 사회 내부의 경제적 이익집단과 집행권력의 직접적 제휴라는 훨씬 손쉬운 통치방식을 채택했다.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제국의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3개 신분들의계급구조로 인해 의회가 강력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것은 독일 부르조아의회주의의 한계였다.
1813/14년 프랑스군대가 퇴각한 이후 관료국가이데올로기에 억눌려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있어서 계몽주의이념, 자유주의이념, 민주주의이념의 영향력은 다른 서유럽국가에 비해 아주 미미했다.
1848년의 3월혁명의 실패 이후 특히 1871년에 군주제국가가 성립하고 난 다음에는 부르조아 스스로가 권위주의적 국가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곧 1871의 파리코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부르조아 프로퍼티에 대한 무산대중의 위협을 불식시키고 동시에 통합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부르조아는 융커를 기반으로 삼은 비스마르크의 철권과 강력한 군사력에 의한 팽창정책을 지지하였다.
3월혁명 당시 적대적세력이었던 융커를 동맹군으로 삼아, 부르조아가 국민국가수립이라는 통합된 시장의 확보에만 매달림으로써,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은 민주주의이념이 제거된 컨스티투션이념으로 축소됨과 동시에, 절대주의시기 이래 지속되어 온 권위주의적 국가전통이 부르조아계급에 대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이센 군부의 덕목, 군인을 인간다움의 이상형으로 설명하는 경향, 보다 고차원적 존재로서의 국가관 등은 1871년 이후 부르조아계급에 있어서도 압도적인 것이었고, 유산계급이 농장과 공장 나아가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자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질서였다. 이러한 전통의 토대 위에서 제국주의로의 전환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손쉽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이데올로기가 학교와 대학, 국가법률학과 철학, 언론과 정당 나아가 노동운동의 우익에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2.. 서경석 [스멘트 학파와 기본권 이론] 의 제1장 스멘트통합이론의 역사적 배경, 제3절 국가법률학의 상황 안에서
"20년대 슈미트와 스멘트 등에 의해 제시된 '컨스티투션학'은 그 이전의 국가학 및 국가법률학의 안티테제로 간주된다. 그 의미변천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학(Staatslehre)이라는 말은 18세기 중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ca)의 역어로 사용된 것으로 영미의 정치학(political science)으로 불리는 내용에 윤리학, 경제학이 보태진 '도덕철학'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게로버에 의해 오로지 국가의 법률적 측면만을 포착하는 국가법률학(Staatsrechtslehre)으로 협소해지고 그 경향은 라반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安世舟, 앞의 논문, 26쪽)
이렇게 성립한 국가학에는 '일반'이라는 형용사가 부여됨으로써 그 대상범위도 국가의 법률적 측면 이외의 현상들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국가학의 국가법률학으로의 퇴화과정은 독일 부르조아의 탈정치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같은 쪽)
한편, 1880년대 라반트 컨스티투션학이 지배적일 때에 기에르케(Otto von Gierke), 해넬(Albert Haenel)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던 법률학적 방법론에 대한 비판은 엘리네크(Georg Jellinek)의 일반국가학(1900))과 슈미트(Richart Schmidt)의 일반국가학(1901)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규범 이외의 영역으로 시야가 넓혀졌다. (Michael Stolleis, 'Verwaltungsrechtswissenschaft und Verwaltungslehre.n der Weimar Republik'(Deutsche Verwaltungsgeschichte, Bd. 4, Stuttgart, 1, 77쪽)
독일 제2 제국말기 이후, 의회주의와 정당제의 득세, 제국의회(Reichstag)에서 연방의회(Bundestag)로 권력의 이동, 란트에 대한 제국권한의 확대 등 일련의 중요한 정부통치상의 변화로 인해, 법률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글자화된 컨스티투션 해석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이 학문에 반영된 결과가, 엘리네크의 '컨스티투션개정과 컨스티투션변천(1906)', 트리펠의 '독일제국에 있어서의 중앙중심주의와 분방주의(1907) "연방국가의 권한과 글자화된 컨스티투션 (1908)', 스멘트의 '군주제연방국가에 있어서 글자화되지않은 컨스티투션(1916)'등의 저작이었다. (같은 책, 100쪽)
일반국가학이 경험적 사실들에게로 시야를 넓힌 것은 발전적인 것이었으나, 규범의 문제와 사실의 문제를 병렬적으로 파악하면서 규범해석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포지티비즘(positivism)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11월혁명의 성과를 바이마르 컨스티투션에 대한 반혁명적 해석을 통해 부정하려고 하는 논자들과 컨스티투션을 국민통합성의 매개물로 삼으려는 논자들에 있어서 일반국가학은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곧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일반국가학은 '컨스티투션이론 상의 근본문제들을 일반적인 국가이론과 철학적, 역사학적, 사회학적 주어진바(Gegebenheit)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지우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Carl Schmitt, Verfassungslehre, 4., unveranderte Aufl., Duncker & Humblot, Berlin, 196.5, Vorwort,.X쪽)
애당초 '일반국가학'은 공적인 법률에 대한 법률포지티비즘(legal positivism)이 다루지 않은 문제들을 법률학 내에서 학문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시도였다.
슈미트와 스멘트에 의해 성격지워진 컨스티투션학'에 있어서의 정치, 법률, 국가, 컨스티투션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재차 국가법률학에 접근시키고 컨스티투션에 관련지우려고 함으로써 일반국가학형태의 법률학적 연구는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스멘트가 말하는 '국가학의 위기'(Rudolf Smend, 'Veriassung und Veriassungsrecht'(Staatsrechtliche Abhandlungen und andere Aufsatze. 2. erweitere Aufl., Duncker & Humblot, Berlin, 1968, 119-'l'16쪽 수록), 121쪽)는 한편으로는 포지티비즘(positivism)의 위기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컨스티투션이론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Stefan Korioth,.nregration und Bundesstaat. Ein Beitrag zur Staats- und Verfassungslehre Rudolf Smends , Duncker & Humblot, Berlin, 1990, 282쪽 각주260)
1차대전과 11월 혁명 전후에 보수적인 국가법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일 제국이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스멘트가 당시 국가학의 상황을 위기로 간주하면서 국가학의 위기를 전쟁이나 혁명이 아닌 정신사적 결과이자 학문사적 결과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폴란드 등의 영토상실과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의 독립, 게다가 프로이센, 바이에른, 튀링 등의 제 2제국내부의 문제로 인해 비스마르크연방체제는 바야흐로 해체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공화국의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력투쟁은 보수적 국가법률학자들의 눈에 반국민적, 반통합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생각의 발로로 비쳐졌다.
이들은 빌헬름시기의 안정적 성장기에 적합했던 신칸트주의의 상대주의철학을 그러한 생각의 배후로 간주하고 비난의 표적으로 삼았다.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권력투쟁을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통합체개념으로 아우르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성 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는 국가철학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그러한 국가철학으로서 보수적 국가법률학자들이 제시한 것은 독일 고유의 전통에 확실한 토대를 가진 낭만적인 스피츄얼리즘들 그 중에서도 생철학과 현상학이었다."
● 포지티비즘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용어이다. 그냥 간단하게 4차 일상언어 교양영역의 경험적인 글귀로 다시 설명하자면, “현실인정 또는 상황논리이다. 어떤 이념이나 목적이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는 것은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 현실상황에서 직접 부딪쳐보라지. 그러면 달라!”같은 태도가 포지티비즘이다. 그러니까, 실재현실의 상황으로 주어진바(포지티브 팩트)를 가장 중요한, 프라이머리한 기준standard로 삼고서 생각을 시작하자는 태도이다.
3.. 독일 국가학과 국가법률학의 정체에 대하여
우리가 <시즌3 정치학>을 공부해온 바에 따르면, 영국의 코먼웰쓰Commonwealth, 미국의 유니온Union(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 프랑스의 리퓌블리크Republique에는
1)인민주권론이 있고,
2)시민사회가 있고,
3)인민주권이념에 바탕해서 시민사회가 컨스티튜트한 정부통치가 있기 때문에,
각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부통치를 각각 이렇게 이름지어 부르는 반면에,
독일에는
1)인민주권론이 없고,
2)시민사회가 미약하고,
3)인민주권이념에 바탕해서 정부통치를 컨스티튜트한다는 시민사회가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독일에는 인민이 아닌 황제가 주권을 갖고, 시민사회가 아닌 관료기구가 주체가 되어서, 헤겔이 자신의 책 [법철학(필로소피 데스 레히츠)]에서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슈타아트Staat>라는 골까는 허구적인 실체fictional entity를 만든다.
이 두가지 경로의 이러한 차이점은 치명적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에는 인민이 주권을 가진 시민사회의 정부통치이론이 곧바로 정치학이기 때문에, 독일과 같은 우회적이고 변태적인 “국가학”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을 필요가 애시당초 없다.
그러나 독일은 인민주권의 시민사회가 허약했으므로 정치학의 개발이 불가능했고, 결론적으로 인민주권의 시민사회와는 별개의 괴물에 해당하는 <슈타아트>를 허구적으로 공상망상하는 학문lehre로써의 변태적인 “국가학”이란 것이 요청되었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영국- 미국- 프랑스의 컨스티투션constitution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서 인민주권의 시민사회가 정부통치를 지배하는 계약문서로써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반면에,
이제 독일의 컨스티투션은, 이 정체불명의 판타지인, 절대적인 가이스트Geist인 <슈타아트>가 위로부터 아래의 신민들에게 선포하고 명령하고 의무지우며 강제하는 규범이 된다.
영국- 미국- 프랑스의 컨스티투션이라는 것은 정부통치를 향해서 인민이 자신들의 라이트(권리)를 선포하는 것인 반면에, 이처럼 독일 컨스티투션은 탄생 자체가 듀티(의무)와 오블리게이션(책무)의 폭력인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의 컨스티투션학은 인민주권- 시민사회와 철저하게 분리된, 프라이빗한 인디비두얼(사적인 개인)을 지배하는, 독일적 파행과 변태 성향의 컨스티투션학이고 바로 독일의 국가법률학이다.
국가학이라는 괴물, 국가법률학이란 변태가 왜 독일에게는 필수필연적이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괴물같은 국가학의 <슈타아트>와 변태적인 국가법률학이 이후 일본을 거쳐 고스란히 한국의 정부통치이론과 법률학을 점령하고 지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포스팅 잘보고 갑니다. 자주소통해요 @suguzag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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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편안하고 힘찬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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