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6. 장로교파 신자들에 관하여
33 영국국교교회는 영국과 아일랜드에만 전파되어뻗쳐 있다. 장로교파는 스코틀랜드의안에서 지배적주도적인 종교다... 이 교파분파의 사제들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급료를 교회로부터 받을 뿐이어서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교감독주교들처럼 호화롭게 살 수 없으므로, 그들은 도달할 수 없는 명예체면들에 반대하여 비명을 지르는 본성의 편당파를 들었던 붙잡았던 것이다La religion anglicane ne s'étend qu'en Angleterre et en Irlande. Le presbytéranisme est la religion dominante en Écosse... Comme les prêtres de cette secte ne reçoivent de leurs églises que des gages très médiocres, et que par conséquent, ils ne peuvent vivre dans le même luxe que les évêques, ils ont pris le parti naturel de crier contre des honneurs où ils ne peuvent atteindre.
35 ... 영국에안에 종교가 하나 밖에 없었다면어떤 종교 하나만 있었다면, 그 횡포를전횡이 염려해야 했을공포였을 것이다; 종교가 두 개 있다면두 개 있었다면, 서로 상대의 목을 쳤을서로의 목을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서른 개나 있으니, 행복한 평화 속에평화와 행복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S'il n'y avait en Angleterre qu'une religion, le despotisme serait à craindre ; s'il y en avait deux, elles se couperaient la gorge ; mais il y en a trente, et elles vivent en paix et heureuses.
편지6. 장로교파 신자들에 관하여 요약 : 이 6장의 이야깃거리는 영국교회입니다. 재치있고 신랄하게 스코틀랜드 장로교파의 엄숙주의rigorism를 볼테르는 꼬집습니다.
그러면서 촌철살인처럼 런던 증권거래소C 얘기를 합니다. 종교와 믿는 신들이 서로 다른 분파들이 효용l'utilité이란 새로운 하나님 앞에서 하나되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
다분히 볼테르는 부르조아적 계산적 추론이성C의 등장을 긍정하는 듯 합니다. 그것이 종교적 존재론R을 능가하는 장면을 유쾌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아마도 루소와 볼테르의 차이일 것입니다. 루소는 추론이성C를 스피노자처럼 불신했으니까요)
그리고 끝에 유명한 글귀가 나옵니다. 이 글귀의 이념은 다름아닌 다양성variety, 다원성multiplicitydp을 향한 찬양입니다. 확장시키면, 다원적 당파들의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볼테르가 보여주는 이러한 <생각의 글자화> 형태는, 어찌보면 그냥 재치넘치고 신랄하며 풍자적인 문학적 묘사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학적 위트와 서사 안에 단단한 개념설계의 감추어진 이념이 뽀득뽀득하게 들어있습니다. 이런 글투와 수사학이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번역을 보자면, 이병애의 한글옮김방식이 뜻의 전달에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습니다. 통사론적으로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번역에 개념사적 지성사적 엄밀함을 내가 요구하는 것 역시도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한권의 책 안에서 조차도 1:1 대응의 표준화(통일, 정합, 일관, 평이)를 지키지 않는, 어휘선택의 자의성, 어휘감각의 자의식 없음 및 성찰없음이 안타까워서 그럽니다.
이러한 점에서 최석기 옮김의 [인간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은 옮김어휘의 선택에서 나름의 일관성(정합성과 평이함은 부족함)이 그나마라도 조금 있어서 다행입니다.
원어 낱말의 한글화가 그나마라도 조금 일관성이 있어서, 읽어나가면서 본성/자연이라고 나튀르이구나, 지성/지력이라고 하면 뤼미에르이구나, 본원적/원초라고 하면 오리지넬르이고, 원시적이라고 하면 프리미티프이구나, 관념이라고 하면 이데에이구나 하고, 그나마 몇몇 경우에서는 1:1 대응을 통해 원어를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종종 이러한 일관성조차 깨어지는 경우가 나오곤 해서, 최석기의 옮김어휘들도 높은 정도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면 드롸를 ~권이라고 일관시키지 못하고 종종의 경우 ~법으로 옮긴다든가, 디벨롭망을 발달이랬다가 발전이랬다가 한다든지, 콩스티튀씨옹을 어떤 때는 구성이랬다가 어떤 때는 구조라고 옮긴다든가, 그러다가 이번에는 오르간을 구조라고 옮겼다가, 어떤 때는 조직이라고 옮긴다든가,
아니말을 어떤 때는 동물이라고, 어떤 때는 생물이라고 한다든가, 그리고 베즈앙을 어떤 때는 욕구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욕망으로 옮긴다든가, 신체라는 낱말이 어떤 때에는 피직크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코르(프)이고 하고, 어떤 때는 템페라망이기도 하는 둥, 최석기의 한글옮김어휘들의 일관성과 정합성도 여러 가지로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이병애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비록 학술장과 번역장 안에서의 표준화된 어휘들이 아직은 준비가 안되어 있고, 아예 없다고 하더라도, 옮긴이는 최소한 자신이 옮기고 있는 한권의 책 안에서 만큼이라도, 최대한의 자의식과 성찰을 동원해서, 자신의 한글옮김 어휘들에 통일성, 일관성, 정합성과 평이함을 갖추어 주어야 할 책임을 지닌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한글옮김이 된 번역책들이 하나둘 점자점차 축적되어야지, 번역자들 사이에서의 표준화 담론이 실질적으로 일어나며, 표준화 담론을 논의하는 번역장이 생겨날 수 있을 터입니다.
지금처럼 어떠한 번역자 아무도 이러한 어휘의 표준화감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결과 번역자 한 사람이 매번 번역하는 책 마다 원어 어휘들을 죄다 뒤죽박죽 자의적으로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자기 느낌에 좌우되어 한글화한다면, 이것은 재앙이며, 지금 우리나라의 번역의 실태이기도 합니다.
더나아가 번역자들이 서로서로 죄다 다르므로 이제는 모든 번역책들 마다 모든 원어 낱말들이 다 제각각으로 자의적인 낱말들이 되어 버립니다.
이래서 한국사람들이 몇 백권의 번역책들을 읽는다 해도, 우리들의 지적인 언어적인 교양적인 패턴학습은 피곤해지고 거듭해서 실패하게 됩니다.
한글옮김어휘들이 1:1 대응으로 원래의 원어낱말들을 뉴런표상화하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 옮김이냐를 따지는 것은 각자의 심뽀영혼의 어휘감각이 작동하므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짓거리입니다.
하다못해, 자신이 옮기고 있는 책 한권 안에서라도 통일성, 일관성, 정합성, 평이함을 스스로 번역자가 만들어가는 것이 첫단추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표준화가 더 낫느냐는 것은 번역장 안에서 다투어질 문제이며, 그 결론은 번역장 안의 평균정당성과 진정성의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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