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오자서 (떠날 때를 알아야)

in k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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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오자서 (떠날 때를 알아야)

오자서[BC 559(?)~BC 484]는 이름이 원이고, 자서는 그의 자이다. 춘추 말기 초(楚)나라 대부 오사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성이 건이고 이름이 황이었는데, 주(周)나라에 공을 세워 오철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오(伍)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오자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아버지인 오사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부 지위에 있었으나, BC 522년 태자 옹립의 내분에 말려들어 장자인 상(尙: 오자서의 형)과 함께 평왕에게 처형당했다. 오자서는 녕(寧: 지금의 하남성 상구 일대), 정(鄭: 지금의 하남성 신정) 등의 나라를 거쳐 아슬아슬하게 오(吳: 지금의 강소성 소주)나라로 달아나, 오나라의 힘을 빌어 아버지와 형을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한 이후 공자광을 보좌하였다. BC 515년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를 탈취하여 오자서를 재상에 임명했다.

BC 50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 즉 공자광)는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6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와 손무는 군대를 이끌고 회수 유역에서 한수로 들어가 5전 전승을 거두고 초나라의 수도 영(郢: 지금의 강릉<江陵>)을 함락시켰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은 이미 죽고 소왕이 왕위에 있었다.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 왕실을 점령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갚았다. 초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그는 신(申: 지금의 황포강 하류 일대)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그를 신서(申胥)라고도 한다.

BC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월(越)나라 구천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었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아들 부차는 오자서를 상국에, 대부 백비를 태재에 임명하였다. 2년 후 오나라 왕 부차는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 왕 구천을 부초에서 격파하고 회계산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오자서는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부차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나, 부차는 그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해주었다. 당시 월나라에서는 구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비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부차를 설득토록 하고, 부차에게는 많은 미인들을 바쳐 그의 환심을 사두었었다. 여기에서 바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자서는 이러한 월나라의 계책을 간파하고 누차 부차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오자서는 부차의 무능으로 오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임을 예감하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두 아들을 제나라의 친척 포목(飽牧)과 유명(維明)의 집에 맡겨두고 왔다. BC 484년 부차는 제후의 패주(覇主)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는 다시 그것을 반대하고 월나라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부차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백비 등이 오자서가 제나라와 결탁하였다고 모함하자, 부차는 그들의 참언을 믿고 오자서에게 속루(屬鏤)의 검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부차에게 말하였다.

"그 옛날 선왕들께는 대대손손 보좌를 해온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제에 부닥쳐도 그 득실을 잘 헤아려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을 버리고, 우매한 간신배들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전횡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왕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부하들에게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강소성 소주)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차는 크게 분노하며 오자서의 시신을 찢어 전당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BC 473년 마침내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자결하면서,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한서(漢書)≫「예문지」에는 오자서의 병서인 ≪오자서(伍子胥)≫ 10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고 있다.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에는 "오상사"와 "오자서묘", "오자서수부" 등의 건물을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오자서와 범려

와신상담의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 두 왕의 옆에는 오자서와 범려라는 명재상들이 있었습니다. 오자서는 충언을 하다 죽음을 당했고 범려는 때를 알고 떠났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범려가 와신상담 끝에 부차에게 승리를 거둔 구천에게서 떠날 때 인용한 문구에서 유래합니다.

범려는 구천이 '공을 나눌 줄 아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나서 세상을 평정하고 나서는 자신의 존재가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을 예견합니다. 이 때 떠나면서 한 말이 "날아다니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도 거두어 들이며, 토끼가 죽고나면 사냥개도 필요 없어져 삶아 먹힌다 (飛鳥盡良弓藏 狡兎死走狗烹)" 즉 토사구팽입니다.

범려의 삶

부차의 무능을 안 오자서는 자신의 자식들을 친척집에 맡기지만 부차를 떠나지 않고 충신으로 남았지만 충신의 역활을 못하고 아까운 죽음을 맞습니다. 대신 범려는 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합니다.

중국인이 범려를 존경하는 이유도 단순히 그가 권력과 금력을 모두 거머쥔데 있는 것이 아니며 일생동안 부와 권력, 미인을 얻었으면서도 아름답게 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범려가 진정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게 하는 데는 스승 귀곡자(鬼谷子)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추구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도법자연 (道法自然)을 설파한 춘추시대 대학자인 귀곡자는 "모든 것은 정점에 이르면 위험에 처해지게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강조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았기에 삶의 최고점에서 자신의 권부를 털어버릴 수 있었으며 극단으로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처럼 범려의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합리, 균형잡힌 사고는 그의 애민사상과 이어집니다. 범려는 전쟁을 감행하면서도,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 하였으면서도 순간순간 백성을 위하는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범려의 이러한 점은 '부와 권력이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할 줄 알 때 영원한 위대함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자서가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면, 정상에서 나락으로 나락에서 정상으로 대신 범려는 자유로운 삶을 즐겼습니다.

떠날 때를 안다는 것, 유혹이나 쾌락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버릴 수 있고 비울 수 있다는 것… 무엇이 이런 지혜를 가능하게 할까요?

지금까지 얻은 경험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과거를 잊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기억은 잊어도 경험은 마음 안에 남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과거를 잊어도 된다고 그러면 지혜의 문이 열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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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라 보팅하고 갑니다.

범려의 스승은 계연이 아닌가.........

귀곡자가 인물인지 학원인지 정확하지는 얺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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