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아빠는 언제 오시나.
머릿 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와서 뭐라고 하실까. 화를 내며 내 소매를 잡아끌까.
동기와 선.후배의 부모님들은 속속 ‘입장’ 중이었다. 그 분들은 자식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상봉을 했다. 그래, 우리 집은 머니까 시간이 걸리겠지.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한편에선 약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1986년 9월이었다. ‘국가적 대사’라는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86아시안게임은 88 서울올림픽의 리허설 같은 행사였다. 정부는 모든 집회와 시위 불허는 물론 엄단 방침을 발표했다. 그 시점에 우리는 감히 데모를 했다. 학내 언론자유와 검열철폐를 위한 투쟁. 당장 3학년 편집장 선배가 학점조항에 걸려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기준 학점 이상이 안 되면 기자를 그만둬야 하는 제도가 악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원고 사전검열 사례도 넘쳤다. 인쇄까지 된 학보를 학교 쪽에서 몰래 몽땅 불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싸우기로 했다. 주간교수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해가 지도록 엄마 아빠는 오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막차를 타고 오실 수도 있지. 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단체로 매를 맞을 때 맨 뒤에 선 심정이 이랬을까.
그날 오후2시쯤이었다. 중앙도서관 앞 민주계단에서 집회를 열었다. 10여명의 학생 기자들이 머리띠를 둘렀다. 8절(A3 크기) 갱지에 타자기로 치고 등사기로 밀어 만든 성명서를 뿌렸다. 편집장이 그동안의 검열사례를 폭로하고 투쟁을 결의했다. 운동권 친구들이 집회에 동참을 했다. 전부 합해 100여명 됐을까. 집회가 끝난 뒤 스크럼(요즘엔 생소한 용어다. 어깨동무를 말한다)을 짰다. 정문 앞에 가서 샤우팅을 하고 주간교수실을 점거하러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스크럼 대열이 100미터쯤 걸었을까. 갑자기 전투경찰이 정문으로 들어왔다. 폭력시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들이 우리를 향해 최루탄을 쏘아댔다. 도발이었다. 흥분이 됐다. 너도나도 보도블록을 깼다. 나도 돌을 던졌다. 급히 학생회관에서 빈 소주병을 들고 와 경찰을 향해 던지는 친구들도 있었다. 경찰의 신속한 대응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시위를 하면 안된다고, 아시안 게임 직전이라고.
학생회관(당시 학생회관은 후문 앞에 있었다) 4층 학보사 편집실 옆의 주간교수실과 전문위원실을 점거했다. 책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그곳에서 기한 없는 농성을 시작했다. 북을 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서너시간 뒤부터 엄마 아빠들이 왔다. 아, 자식들의 고귀한 투쟁을 격려하고 힘을 주러 오신 것인가. 설마, 그럴리가.
나는 2학년이었다. 1학년 후배 아버지가 농성 장소로 와서 아들의 멱살을 잡았다. 아직도 그 아버지의 한 마디를 잊을 수 없다. “입학원서에 잉크도 안 마른 새끼가.” 그러고는 아들에게 손찌검을 했다. 집에 가자고 했다. 후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호를 가장 멋지게 외치던 후배였다. 팔을 힘차게 내저을 때마다 손목에 스냅을 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후배가 저 정도인데, 나는 선배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는 언제 오시나.
편집장 선배의 일가족이 다 몰려왔다. 선배는 형과 누나들이 많은 대식구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꼬꼬할아버지였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하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 옆에서 큰형이라는 분이 편집장 선배에게 큰 소리를 치며 뺨과 머리를 때렸다. 후배들은 안스러운 눈길로 지켜볼 뿐이었다. 편집장 선배는 고개를 숙이고 맞기만 했다.
엄마아빠들에게 누가 연락을 했을까. 아마도, 학생처 직원? 아니면 관할 노량진경찰서 정보과 형사?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할까. 뭐, 그럴 필요까지. 아무튼 엄마 아빠들이 농성장소로 와서 자식들을 끌고 가려고 했다. 자식들은 심지가 굳었다. 아무도 흔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끌려갈 위기에 놓였을 때 학생기자들이 둥그랗게 원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 말이다. 울컥했다. 나도 눈물을 쏟았다. 신파였을까? 그때는 진지했다.
밤 12시가 되어도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이른바 닭장차로 불리는 전투경찰 버스와 병력이 후문 골목에 희미하게 보였다. 밤중에 전투경찰들이 학생회관으로 들어와 우리를 다 잡아갈지 몰랐다. 운동권 친구들이 교련복을 입고 화염병으로 무장한 채 셔터를 내리고 학생회관 경비를 서주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우리 엄마아빠는 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아빠만 오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날 무시하는 거야? 물론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행이지 뭐.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교정을 돌며 시위를 했다. 전날 아버지한테 맞았던 후배는 플래카드를 들고 맨 앞에 섰다.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다시 등장했다. 집에 안 가셨나? 아니면 일찍 또 오신 것인가. 그 분은 화가 난 표정으로 어제와 같은 말씀을 반복했다. “입학원서에 잉크도 안 마른 새끼가…” 그래도 장한 우리의 아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구호를 외쳤다. “사전검열 철폐하고 언론자유 쟁취하자.” “학점조항 철폐하고 언론자유 사수하자.” 그 모습을 보자 아버지는 더욱 흥분했다. 자신의 한쪽 구두를 벗어들고 아들의 머리통을 갈겼다. 입학원서에….잉크도…안 마른…새끼가….입학원서에…잉크도…. 지금 그 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을 해보면 뭉클하다. 아들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 아버지 역시 한 숨도 못 주무셨겠지.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이틀 밤을 새우고 농성을 했지만, 편집장 사임은 막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 기자의 사설 집필권 등 몇 가지만 따냈다. 농성이 종료되고, 후문으로 나와 혼자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가던 그 밤길을 잊지 못한다. 보름 뒤쯤 편집장 선배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구속되었다. 한달 뒤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얼마 뒤 군대를 갔다.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는 왜 안 온 것인가. 아니, 왜 학생처 직원 또는 노량진경찰서 형사들은 왜 “당신 자식이 지금 나쁜 짓, 위험한 일에 휘말려 있다”고, “빨리 와서 데려가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를 입을 수 있다”고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 모든 집에 다 전화하면서, 왜 왜 왜 우리 집에만 안 한 것인가.
4개월 뒤인 1987년 1월 나는 신당동에서 기습 가두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게 재수없이 잡혔다. 근처 성동경찰서로 끌려갔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파문이 번지던 때였다. 일주일간 경찰서에 구금돼 있다가 구류 2일을 살고 풀려났다. 그때 성동경찰서 형사들은 노량진경찰서 정보과로 전화해 내 신상정보를 캤지만, 엄마아빠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1988년 6월엔 연세대 앞을 지나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서대문경찰서로 갔다. 그때도 우리 엄마아빠는 모르고 지나갔다. 1989년 봄, 졸업생 신분으로 일요일 학보사에서 놀고 있다가 학생회관을 수색하는 백골단 대원들한테 이유도 모르고 연행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량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아무 혐의도 없어 다음날 풀려났다. 그때 형사와 이런 대화를 했다. “고향이 어디야?” “원주인데요.” “부모님은 어디 계셔?” “원주요.” “………….” “원주에 전화하실 거예요?” “우리가 예산이 부족해 시외전화는 걸지 않아요.”
그렇다. 비밀이 풀렸다. 시외전화 거는 비용이 무서워 연락을 안 했던 거였다. 내가 주동자급이었다면 달랐을 지도 모른다. 1986년에도, 1987년에도, 1988년에도, 1989년에도 시외전화비 아끼려고 우리 집에는 전화를 안 했던 거다. 초등학생도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2019년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한 집에 겨우 하나씩 전화기가 놓여지던 시절이었다. 공공 사무실이나 하숙집엔 남들이 시내전화 거는 것조차 막으려고 검은 전화통 다이얼에 자물쇠를 채웠다. 시외전화 오래 걸면 요금폭탄이라도 맞는 줄 알던 때였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고민했다. 우리 엄마아빠는 언제 오시지? 왜 안 오시지?
서울-원주는 고속버스를 타면 1시간 50분. 열차로는 1시간 반. 별로 멀지도 않은데, 시외전화 한 통에 벌벌 떨어준 학생처 직원 또는 경찰공무원들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지방에서 아들을 서울로 보냈던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셨으니 감사패라도 뒤늦게 드리고 싶은 마음!
(이 글은 2019년 썼다. 글들을 모아 책으로 묶는다 해서 옛 기억을 꺼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