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사기를 읽다, 남의 나라 2천 년 전의 역사책을 읽고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책을 스스로 편협하게 읽는 사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책을 통해서 새로운 책을 알게 되고, 연관 서적으로 읽는 호기심이 옮겨 붙는다.
그러다 옛날 제가 백가의 생각들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그 후 사서삼경을 읽어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 과정을 통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읽게 된다. 그렇게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한 번씩을 읽게 되었다. 시경은 잘 와 닿지 않고, 주역은 잘 모르겠다. 그 말이 정확한 설명이다. 변화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전후가 맞지 않는 말이다.
시간을 흘러 공자를 지나고 제자백가의 손자병법을 읽다 노장사상이 노자, 한비자, 장자와 함께 흐른다 설명을 보았다. 그래서 다시 이 책들도 보게 되고, 그 이후에는 유교 입장에서 잡서 아닌 것이 없지만 귀곡자도 보고 묵자까지 읽어 보게 됬다. 눈에 들어왔다고 모두 마음에 들어온 것은 아니며, 마음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가 백가의 춘추전국시대는 집단적인 전쟁과 생존을 통해서 사람들이 머리를 잘 써야 하고, 입을 잘 놀려야 살며, 먹고살기 위한 기상천외한 사고가 요구된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 현상을 바라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유세를 하며 세를 불렸다. 선진 4가인 유가, 법가, 도가, 묵가를 보면 서로 공통점이 있고 다름이 있다. 겸애와 비공의 묵가, 도와 덕이 자연의 순리와 같이 운행되길 바라는 노자, 그 자연의 변함없는 원리가 법이란 규칙으로 적용되기를 바라는 법가, 극기복례라는 교육을 통한 인간 문명 발전을 기대하는 공자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름을 주장하지만 인간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행동을 살펴보는 공통점이 있다.
학자들은 다름을 부각하고 찾아낸다면 나는 다름이 조화가 되는 생각을 따라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이고, 그 삶을 하나의 얄팍한(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고려하면) 사고로 평생의 변화를 대응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이 도가, 법가, 유가, 묵가로 딱 나뉘지 않는다. 지금 서양의 철학과 새로운 사조까지 더하면 다 덜어내고 새것만을 담을 수도 없다. 인간이 그렇다. 각의 사람에게 마음의 비중이 서로 다를 뿐이다.
묵자는 세상 사람을 차별 없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겸애의 정신이 있다. 저자가 좌파 유교라고 칭하는 표현이 재미있다. 수신(修身)의 관점에서 맹자와 묵자가 상통하고 인의(仁義)로 보면 유사점이 있다. 묵자가 속유(俗儒)를 비판하는 것은 그 비판의 배경에 유가에 대한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비판적이다. 인(仁)이라 정의되는 유가에서 의(義)를 더해서 인의라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묵자는 이렇게 세상을 두루 넓게 사랑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세상의 현상을 관찰하고 이해하여 사전과 같은 경설을 남긴 것은 아닐까? 이런 정확한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려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이 서구 문명과 비교하면 한참 빠르다. 기원전 470년에 태어났으니 엄청 빠른 접근이 아닐까? 이 결과물을 통해서 자신의 사고와 앎을 깨우쳐 궁극적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을 보면 좌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통설에 왼손잡이들이 똑똑하다고 말한다. 그런 말도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좌파들은 잘 못한다. 너무 이성적이라 그렇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 가끔 감정이 혼돈된 존재다. 묵자의 유가에 대한 비판을 나는 이런 관점에서도 보고 있다.
그 뛰어남의 효익을 이해하고, 친사(親士)와 같이 지식인, 지혜로운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고 말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가 지금과 같은 데이터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꽤 괜찮은 과학자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기원전 500년 전에도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가 말하던 정보화 사회, 지식기반 사회라는 인간 문명의 구조적 핵심을 간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적이 드물다.
이렇게 세상과 사람을 두루 사랑하기 위한 실력을 쌓아서, 당시의 시대환경의 과제인 비공(非攻)을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성의 방법과 공성을 파쇄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많은 내용이 할애됐다. 이는 다른 학문과 같이 자신의 관념적 생각과 정의를 남기는 것보다 당장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을 선택한 것이다. 절용(節用), 절장(節葬)과 절제와 검소함을 강조하는 것 또한 장구한 세월을 살아갈 삶에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생각된다.
다만 인간의 마음이 나뉘지 않듯, 공자는 음악을 통해서 의미를 찾고, 묵자는 음악을 통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을 경계한다. 지금의 세상도 음악을 통해서 힐링과 깊은 예술의 필요를 느끼고 음악을 통해서 사회가 어지러워진다고 하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다. 나는 이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바뀌게 되어 있다. 공자는 지금 시대로 와도 비슷할 개연성이 있지만 묵자는 현재의 시대를 살아간다면 보다 발전적인 모습이었을 듯하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것이 행운이자 또 불운이다.
내 상상으로 그가 현재에 온다면 Why 시리즈와 같은 책은 훨씬 잘 만들었을 듯하다. 다른 상상은 마주하면 꽤 매력적이지만 상당히 머리 아픈 스타일이라고 생각된다. 스타일이 왜 이리 잘 떠오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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