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이 끝난다. 13년. 2005년부터 2018년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다.
소위 장수 프로그램들은 역사성과 계급성을 갖고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전원일기’는 가족의 전폭적 지지를 통해 상경. 교육을 받고, 도시생활을 하는 장남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시골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채무감을 계속 리마인드 시키는, 그러므로 아직 토지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개인을 소환하고 가부장제를 반복재생시키는 기제였다.
‘전국노래자랑’은 몰락하는 지방중소도시의 회환과 소시민적 불안을 담아냈다. 불안함이 증폭되면 증폭될 수록 출연자들은 기괴한 옷과 기괴한 동작과 기괴한 노래를 쏟아냈다. 80년대가 담고있는 뒤틀린 대한민국의 내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도전은 ‘잉여’들의 하위문화를 주류 공중파로 끌어올려 대중성을 확보했다. 젊은이들이 잉여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은 것은 몇년되지 않았지만 무한도전은 첫 출발부터가 잉여로왔다.
무한도전 초기 에피소드 중 기억나는 것은 기차와 달리기 내기를 하는 에피소드이다. 평균이하의 신체능력, 평균이하의 신장과 몸매, 평균이하의 지적능력, 평균이하의 인성을 갖고있(다고 캐릭터화 된)는 멤버들이, 결정적으로 평균 이하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노란 쫄쫄이 옷을 입고 기차와 달리기 시합을 했다. 결국은 패배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엄청 열심히 달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구나 평균 이상의 삶을 원하고 경쟁할 때, 스스로를 대한민국 평균 이하라고 소개하며 사회적 효용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기차와의 달리기에 매진하는 자들. 이들에게 한국은 함께 웃고 울면서 박수를 보내왔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한도전’도 살짝(?) 변해왔다. 처음 얼마간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무한도전’이 아닌 ‘무모한 도전’이었다. 실패를 전제로 한 도전. 그것이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성공가능성을 염두에 둔 도전이다. 기차와의 달리기 시합. 그 의미없고 실패 밖에 없는 도전은 제작진도, 소비자도 지치게 했을 것이다.
무한도전이라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성공가능성을 염두에 둔 도전. 비록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었을 망정, 대중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때부터는 무의미한 도전이 아니다. 잘나가는 대중음악가들과 짝을 이루어 가요제를 벌이고, 국가대표들과 연습하며 조정, 레슬링, 봅슬레이 등의 경기에 참여한다.
더이상 잉여들의 자기파괴적 놀이가 아니다. 성공을 하면 더 할 나위 없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대중들에게 선사했고, 실패하면 실패한대로 아름다운 도전이었다는 위로를 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잉여들의 하위문화는 대중적 마취제로 이미 변질되어 있었다. 넘쳐나는 잉여들에게 한편으로는 꿈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를 주는 강력한 환각제로 기능해왔었다.
하지만 한국이 절망적 10년을 보내는 동안, 특히 박근혜 정권의 등장과 MBC 파업 등을 겪으며 무한도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와 동력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꿈꾸기에는 지독히 답답한 시절이었고, 위로받기에는 상처가 너무 처절했다.
아무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기는 바뀌었다. 상식적인 꿈을 꿀 수 있다고 믿는 요즘 잉여들의 정체성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은 없어보인다. 다행이다. 이전 정권하에서 끝내지 않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종영을 결정한 것은 매우매우 다행이다. 스스로 끝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왠지 한 세대가 저무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