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아침에 발행하는 조간과 저녁에 발행하는 석간이 있다. 여기에 긴급한 대형 속보를 전하는 호외가 있다. 이렇게 시간에 따라 발행하는 것은 하루 소식의 간격을 맞추기 위해서다. 이러한 전통적인 신문의 뉴스 발행 방식은 이제 이전 시대의 유물이 됐다. 저녁에 발행하는 석간은 이미 사라졌다.
뉴스는 말 그대로 새로운 소식이다. 신문과 언론이 빠른 소식 전달을 위한 매체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요소는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언론의 기능인 편집 기능에 따라 전달 방식이 달라진다. 그래서 언론사는 크게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와 이 기사를 배치하는 편집부로 나뉜다. 여기에 신문 이후의 매체인 방송은 실시간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보도국이 추가됐다. 그래서 뉴스 전달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은 기자가 쓴 기사를 선별하고 배치하는 편집부에 있다. 편집부의 중요성은 신문언론의 발행 시간보다 전달 방식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자는 기사를 쓰고, 편집자는 그 기사를 언론사의 방침에 따라 적절한 면에 배치한다. 신문은 그래서 글쓰기의 총체이다. 독자가 새로운 기사를 접하는 순간, 새로운 뉴스는 글로 살아나 묘사되고 다시 새로운 뉴스가 된다. 전날의 소식이라 해서 과거의 사건으로 취부되지 않는다. 언론의 기사야말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신비로운 언어 작용인 것이다.
사건과 사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 열리면 그 사건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서 존재의 사유를 만든다. 이런 존재 사건은 다가올 미래에 투영되어 존재가 기투하는 계기가 된다. 어떤 사건의 뉴스는 이렇게 존재사건이다.
실시간 뉴스의 함정
온라인 시대의 뉴스는 실시간으로 과거의 경험적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을 제거한다. 실시간(Real time)은 기사의 기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온라인 뉴스는 기자의 글쓰기와 편집자의 논지의 역량보다 빠른 화재성이 주목받기 때문에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은 뉴스라기보다 단순한 소식의 짜집기이다. 현실태는 언어와 의미에 의한 구성으로 잠재적인 목적을 내포한다. 잠재의 부재는 현실 없는 현실태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뉴스를 기다리는 기대감을 반영하지 못하면 비판의 잠재성은 부재한다.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뉴스에서 존재가 사태 속에서 들어가기보다는 사태의 주변에서 휘말리며 머무른다. 그렇게 존재는 사태에 기투하지 못하고 빠른 눈놀림만 반복한다.
예술은 인식이고, 철학은 이 인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지금-여기에서 체험하는 것으로 예술가가 동작을 반복하면서 완성한 승화이다.
범주에서 설명하면 과거의 기억과 행동이 불현듯 현재에 나타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와 라캉은 승화가 예술가의 예술을 창조하는 추동이라 했다. 승화는 리비도를 직접적 형태로 나타내지 않고, 사회적인 문화적인 형태로 바꾸어 욕망을 만족하게 한다. 예술은 무의식의 시간을 초월하는 승화의 산물이다. 예술의 범주와 같이 문학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승화의 반복적 요소가 있다. 글쓰기는 인간의 이성적 비판의 활동이지만, 무의식적 반복도 내포하고 있다. 기자의 직업으로써 글쓰기는 사건을 사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승화의 이면인 것이다. 상징계 사회는 언어 활동으로 나타나고, 뉴스의 전달은 철저히 이 상징계의 언어로 주체화된 상징적 실재이다.
인터넷 시대의 기사는 언론 주체의 리비도보다는 클릭하고 반응하는 독자의 응시에 더 부합하려 한다. 그래서 기사의 타이틀을 더 자극적으로 만든다. 독자는 기사내용보다 제목이, 장문의 논리정연한 글보다는 단문의 요약 글을 더 선호한다. 이런 단문 기호의 넘침은 각 언론사의 반복적인 기사의 차이를 획일화로 집어삼킨다. 각 언론사의 기사와 편집의 정체성 구별은 사라지고, 논리와 비판의 자극보다 화제성 논란의 화학적 반응이 우선시 된다.
신문은 일종의 책 넘김이다.
문학이 연속의 사건을 기술한 예술의 영역이라면, 신문은 세계의 소식을 구성한 단편소설의 묶음이다. 독자는 기사를 읽으면 사건으로 들어간다. 언론의 또 다른 구성인 칼럼과 사설을 읽으며 비판적 사유를 경험한다. 세계 내 존재인 독자는 신문 안에서 분노하고, 기뻐하고, 기대감으로 희망하며 절망하는 현실을 응시한다. 반면에 인터넷 공간에서 독자는 노출된 기사만을 읽은 피동적 존재이다. 수동적 손재는 현실의 응시보다 시선을 강탈당한다. 클릭과 뒤로 가기의 반복의 손놀림에서 세계 내 존재라기보다는 세계의 이미지 안에 머무는 스펙터클 소비의 부속일뿐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시간의 기다림과 반가움이다. 언론의 기사와 문학의 글쓰기, 예술가의 작품 만들기는 시간을 초월한다. 태초의 시간에서 현재의 어디쯤까지,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우주의 먼 곳에서 오는 시간만큼 글쓰기의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다. 이렇게 활짝 영원을 맞이했을 때 새로움은 가능성으로 남는다. 현실의 실재가 잠재의 실재로 전환하는 반가움이 곧 뉴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