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재규입니다. 아침에 검색질을 하다가 재밌는 뉴스를 보고 출근 전에 짧게 글 올려볼까 합니다.
뒤늦게 안 사실입니다만, 새해 첫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인공기가 은행 달력에 등장하는 그런 세상이 됐다"는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그림인가 봤는데 정말 보고 웃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 위에 링크한 한겨레 기사
초등학생 때 인공기 그린 썰
문득 20여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생각나지 않지만 1990년대 중반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입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셨던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그때만 해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었고, 호국보훈이란 명목으로 글쓰기, 그림그리기 등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교과서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북한의 실상을 다룬 내용의 교재도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일성은 머리 뒤에 큰 혹이 난 괴물로 묘사되고, 북한 주민들은 괴물의 세뇌에 의해 착취당하면서도 착취당하는지도 모르는 불쌍한 존재로 그려지는 그런 교재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 6월의 어느 초등학교의 교실, 종례 시간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숙제로 호국보훈 포스터 그리기를 내줍니다. 기한은 1주일.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호국보훈 관련한 내용을 떠올리며, 호국보훈의 달에 걸맞는 표어와 함께 그림을 그려오라는 숙제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소년은 학교에서 배웠던 호국보훈 교재를 꺼내듭니다. 공책 크기에 겉은 하늘색이었고, 두께는 50페이지 전후로 기억나는 책입니다. 호국보훈 교재의 이런저런 내용들을 보던 소년은 하루빨리 남북 통일이 이뤄져 괴물의 압제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이 구출되면 좋겠다는 내용을 그려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표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비스무리한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정확한 포스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괴물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북한 주민이 눈물을 흘리며 풍족한 남한 주민의 품에 안기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른쪽 위에는 괴물이 눈을 흘기며 북한 주민을 잡으려 하고, 북한 주민은 거기서 벗어나 아파트와 자동차를 갖고 있는 남한 주민의 품에 안기는 대략 그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년은 남한과 북한을 어떻게 구별지어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 결과 소민은 남한 쪽에는 태극기를, 북한 쪽에는 인공기를 그리기로 합니다. 그림 실력이 좋았다면 남한 주민들은 부유하고 살찐 모습으로, 북한 주민들은 깡마르고 불쌍한 모습으로 그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정도 그림 실력은 소년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의 국기를 그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PC 통신 외에는 외부의 정보를 접할 길이 거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대략 배운 기억이 있기에 인공기가 대략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았습니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있고 별 같은게 그려져 있다는 느낌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정확하게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천리안의 이런저런 게시판을 기웃거렸습니다. 채팅방 같은 곳에 들어가서 물어봤지만 채팅방의 사람들은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그건 왜 물어보냐고 오히려 추궁했습니다.
PC통신 프로그램 '이야기'를 종료하고 집 안에 있는 여러가지 백과사전을 뒤져봤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보라고 사주신 백과사전도 뒤져봤고, 부모님 책장에 있는 이런저런 책들도 봤지만 끝내 인공기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구독하시던 모 신문을 뒤지던 중에 인공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슨 기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북한 군사훈련을 담은 사진기사였겠죠. 그걸 보고 저는 북한 주민 쪽에 인공기를 그려넣었습니다. 포스터를 완성하고 난 뒤 소년은 '그림 실력이 좋지 않아 칭찬은 받지 못하겠지만 이정도면 어느정도 호국보훈의 정신에 맞는 것 같군'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 숙제를 완성한 소년은 포스터를 학교에 가져갑니다. 조례 시간, 선생님은 학생들의 포스터를 걷습니다. 평소 미술을 잘하던 친구의 그림을 보고 너무 잘 그렸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별다른 평가 없이 소년의 포스터를 걷어갑니다. 미술을 잘 하던 친구에 비해 소년의 미술 실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위의 포스터 그림보다는 훨씬 조악한 작품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소년은 숙제를 끝냈다는 생각에 뿌듯해합니다. 그렇게 그날 하루도 지나갑니다. 그런데 종례까지 마친 뒤 선생님은 잠시 소년을 부릅니다. 'xx아 집에 가기 전에 잠시 교무실로 올래?' 소년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합니다. 혹시 내 그림이 생각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걸까? 라는 약간 허황된 생각도 합니다.
교무실에 들어선 소년에게 담임선생님은 아침에 걷었던 포스터를 다시 건넵니다. 'xx아 미안하지만 이거는 조금 다시 그려와야 할 것 같구나.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아마 잘 설명해주실 거야' 소년은 그림 실력이 너무 형편 없어서 빠꾸를 맞은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하지만 소년에게 빠꾸를 먹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소년과 함께 하교를 하던 친구들은 '왜 늦었냐'고 묻습니다. 소년은 선생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선생님으로부터 포스터를 다시 그려오라는 말을 들었다며 친구들에게 포스터를 보여줍니다. 포스터를 골똘이 보던 한 친구가 말합니다. 그는 '야 너 왜 이런걸 그려놨어'라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인공기를 가리킵니다. 소년은 북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렸다고 설명하자 친구는 '이런거 잘못 그리면 큰일나니까 선생님이 다시 그려오라고 하신거야'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뭐가 큰일난다는지 당췌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집으로 돌아옵니다.
부모님이 집에 오시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소년은 포스터를 보고 또 봅니다. 그러면 북한 주민 쪽에 '북한'이라고 써야 하는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PC통신 채팅방에서 인공기의 모양을 물어보는 소년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던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론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그 이후 특별히 이 일로 혼나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소년의 부모님은 소년에게 북한 인공기를 그리는 것은 무단횡단처럼 불법이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잡아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을 겁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호국보훈 글짓기로 교내 상을 받았던 적이 있었기에 '정상참작'이 되어 그냥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금은 당시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이 등장인물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초등학생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로 인공기를 그려넣었을 뿐인데 그걸 갖고 학교 선생님, 친구들, 부모님까지 호들갑을 떨었고, 인공기를 그리면 왜 안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때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북한 정상이 두 차례나 만났고, 20년 전보다도 남북한의 격차는 훨씬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구글에 '북한 국기'라고만 쳐도 인공기의 모습은 물론 인공기의 유래, 규격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공기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기사 하단을 보면 자유한국당의 수석대변인이라는 자가 "친북 단체도 아니고 우리은행이라는 공적 금융기관의 달력에 인공기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한 것도 나옵니다.
북한에 나라를 갖다 바치자는 내용도 아니고, 남북한 사람이 화합해서 잘살아보자는 취지의 초등학생 그림에 인공기가 그려졌다는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홍준표나 장제원 같은 이들이 오히려 자유대한민국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북한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는 이들입니다.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의 압도적인 우위를 확신하지 못하고 인공기만 보고도 겁먹어서 쩔쩔매는 이들입니다. 북한의 인공기를 본 대한민국 국민이 김정은을 찬양하고 종북세력으로 돌변할 것처럼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홍준표나 장제원은 정치권에서 나가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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