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고등학생 시절 활동했던 독서토론회를 찾아갔다. 토론 전에는 항상 선생님의 수업이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말미에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없냐."라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은 분명히 기억난다. “준규가 서울에서 빈부격차를 몸으로 느끼고 왔구나.” 도대체 나는 1학년 1학기에 무엇을 느꼈던가. 돈 때문에 힘든 시간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급식만 주야장천 먹어댔으니, 바깥 물가를 알 리가 없었다. 매일 같이 학식, 제일미가 등 비교적 저렴한 가게를 들락거렸다. 나중에 좋아하게 된 솔나무집 된장예술도 2학년 때 처음 가봤으니, 돈은 항상 나의 걱정이었다.
부모님은 곧잘 ‘돈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객관적 지표가 돈 걱정을 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대학생활 내내 340만 원가량의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항상 2,3분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 가족의 재정상황은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 바로 위이다. 아버지는 “돈 걱정하지 마라.”와 “다른 사람에게 재정상황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라."라는 말을 섞으셨다. 돈 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신 걸까. 아니, 우리 사회가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그걸 온몸으로 느끼신 분이었다.
런던, 파리, 뉴욕 어디든 상관없이 휴대폰 꺼놓고 떠나고 싶다는 볼빨간사춘기의 노래 여행. 신나는 멜로디에 안지영의 경쾌한 목소리가 곧장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싶게 만든다. 그런데 나는 좀 달랐다. 나는 여행이 썩 달갑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여행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환이랑 갔던 내일로, 친구랑 갔던 군산과 강릉 등 갈 때마다 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왔다. 왜 나는 여행에 소극적인가. 여행을 듣다 보니 “나는 여행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병’이 걸릴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많이 경험했기 때문 아닐까. 경험의 원천은 돈. 아, 결국 가난해서, 여행을 갈 수 없었구나. 방학마다 장기간 여행을 가는 친구들. 그들 가운데는 파트타임을 열심히 하여 다녀온 친구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친구들은 ‘집안 형편이 괜찮아서’ 여행을 쉽게 다녀올 수 있었다. 대원고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일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펼쳐지고 있었다. 제주도 한 번 제대로 간 적 없다는 아버지. 60대가 다 되어서야 세계테마기행에서 벗어난 어머니.
전역 무렵 나는 친구와 여행을 계획했다. 정말 마음을 먹었다. 군대에서 모아둔 돈은 없었다. 어차피 휴가 나와서 모은 월급에다 부모님 돈을 쓰게 되는데, ‘저축해서 뭐 하겠나.’라는 생각으로 모으지 않았다. 그래서 꽤 많은 돈을 부모님에게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결국 허락했지만 처음엔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라며 반대하셨고, 어머니는 “빚을 내서라도 갔다 와라."라고 말씀하셨다. 빚을 내서 여행 가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여행 가고 싶진 않았다. 돈은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결국 장학생 캠프 일정 때문에 포기하긴 했지만 갔어도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모두의 관심사이자 걱정거리가 된다. 걱정은 두 가지로 발전한다. 하나는 걱정을 발전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다른 하나는 걱정을 있는 그대로 두려는 노력.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발전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든 더 벌려고 애쓴다. 돈은 걱정거리니까. 그런데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벌어야겠다고 생각은 한다. 나의 발전을 위해서, 취미 생활을 위해서, 부모님께 보답하기 위해서. 하지만 어느 정도 벌면 그만이다.
돈은 제1가치가 될 수 있다. 나는 돈을 제1가치로 두는 사람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유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하지만 동시에 돈만을 제1가치로 두는 사람은 불행해진다고 나는 믿는다. 돈의 맛을 느낀 사람은 아마 엄청 비웃을지도 모른다. "네가 아직 돈의 맛을 못 느껴서 그런 거야.”라며 생각하겠지. 내가 부자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다. 하지만 “나에게 돈이 많았다면?”이라는 가정은 쓸모가 없다. 그런 가정을 해봤자 통장 잔고가 늘어나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부모의 재력을 향한 원망만 커져 간다. 그렇다고 통장에다가 욕을 하겠는가? “노스페이스 패딩 사달라.”고, “유럽 여행 한 달 보내 달라."라고 통장에다 말하는 사람은 없다. 대상은 부모님이 되고, 부모님은 자식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돈이 많아질수록 노스페이스 패딩도 사고, 유럽 여행도 갈 수 있으니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아니. 나는 오히려 돈이 사람을 망친다고 생각했다. 특히 돈의 맛을 한 번 느끼고 어쭙잖게 돈 버는 사람들이 제일 고통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은 돈에 미쳐간다. 쌓은 돈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한 채 돈만 쌓여간다. 어쩌자고 돈을 그렇게 모으는지. 돈 때문에 싸운다.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회는 이런 흐름을 심화시킨다. 인생에 돈만이 중요한 가치가 되는 사회,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회. 끝없이 쌓일 수 있는 돈을 잡으려다가 돈의 노예가 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쓰레기 취급받는 사회. 경제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결혼 상대를 찾는 사회. 좋고 나쁨으로 대학을 가르고, 노력에 기댈 수 없으니 우연(복권, 사주 등)을 믿는 사회. 이길 게 없어서 인종을 차별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돈을 수단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 다시 정리해야 한다. 나도 돈을 정말 많이 벌어보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투자는 언젠가 해볼 생각이지만 사업에는 관심이 없다. 아마 제대로 못할 걸 알아서 그런가 보다.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돈, 그걸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이면 충분하다. 근데 나도 알고 있다. 그 정도가 꽤 많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보수가 괜찮은 직장을 들어가야만 한다.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하지만 돈을 주구장창 벌 욕심을 버렸다. 임금노동자의 삶으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대신 나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고, 흥미를 가지는 직업을 선택하기로 했다. 직업선택의 제1기준이 가치고, 제2기준이 적당한 보수다. 그만하면 된다. 돈은 그 정도 벌면 된다고 말해주는 배우자. 그런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게 내 꿈이다. 평생 동안 돈으로 스트레스받기는 싫다.
혹자는 내 글을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화.”라고 일갈할 수도 있다. 나는 돈을 못 버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능력껏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돈을 못 벌어서 비판을 받는다면, 그건 그 사람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다. 그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무시하는 발언이고, 존엄을 없애는 발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존엄과 주관을 찾으려는 노력을 일절 하지 않으면서 “돈 없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가치도 찾지 않으려고 한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직업의 희소성 때문에 분배를 많이 못 받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향한 배려와 위로가 필요하지만, “네가 노력 안 했으니 못 버는 게 당연하지. 돈을 못 벌면 쓰레기.”로 모든 게 귀결된다. 경쟁이 공정하지도 않은데, 개인의 책임으로 모든 게 귀결된다.
대학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이랑 대학을 가고자 들인 노력을 존중하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2년간 여행을 떠난 사람을 두고 “쟤는 별 볼 일 없는데 좋은 기회나 받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별 볼 일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잘 갔다 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중국인, 조선족, 인도네시아인-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차별하는 사람과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돈을 오직 제1가치로만 두는 사람은 돈에 미친 노예가 되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평가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이 돈의 위력을 느낀다. 나도 집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강정을 꾸리고, 다른 친구들을 만나다보면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평생을 물질과 싸워야 할 것 같다. 물질은 이길 수 없는 존재다. 물질은 언제나 갑이고, 나는 언제나 을이다. 하지만 갑에 굴복하지 않고 이기려 노력하고, 다른 가치를 찾으려 노력할 때, 인생은 빛난다고 생각한다. 돈을 수단으로 바라보기, 물질과 거리두기. 삶의 존엄과 주관 찾기. 평생 해나가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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