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있는 저녁 (동양철학 50)

in philosophy •  6 years ago 

궁금했다.목차를 보고 더 궁금했다. 그 많은 이야기를 한 권에 다 담을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과 익숙하지 않은 근대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모든 철학과 학문, 분야도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발전도 호기심이 없다면 무동력 기계처럼 외부의 인위적인 힘이 강제하는 방식을 벗어날 수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을 '인간과 우주의 호기심'으로, 동양철학을 '지금 이곳에서의 삶의 태도'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살지'로 바라보는 관점이란 추천사가 신선하다. 나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우주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 '태초에~~'로 시작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시작은 벌써 이루어진 뒤다. 태초 이전은 알 수가 없다. 동양도 태극, 음양을 말한다고 보면 서양과 같은 근원적 호기심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갖고 책을 시작했다. 책을 읽는 다고 글쓴이를 항상 기계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사를 나의 낮은 지식과 이해로는 "노자와 공자에 대한 끊임없는 주석놀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근대에 서구 문물과 힘의 자극이 관념적인 주석놀이를 끝냈다. 그들의 새로움을 동양의 것에 더하고, 보다 현실적인고 실존적이며, 실용적인 방식으로 변해오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필요한 때와 지금 필요한 것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 천년을 이어지면 인간 문명에 그것에 남아 있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서양이 다시 동양을 배우는 과정이 이를 입증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각 시대를 살아낸 철학자들은 노자와 공자의 생각을 여러가지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새로운 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인위와 무위로 대표되는 두 할배의 집필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들 이후에 그들만큼 대단한 경전을 만든 사람이 있는가? 말은 한 세대를 가고, 글을 백 년을 가고, 정신은 천 년을 간다는 실체를 확인하는 셈이다.

예전에 불교방송에서 하는 강연회에서 최진석 교수를 본 적이 있다. 공자의 유교와 노자의 도가를 대립의 구조로 설명한다. 대립한다는 것은 양립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립이지만 서로 보조적인 면으로 생각할 수 없을까를 질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노 교수의 말이 고마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노자가 와닿는다는 말을 들어왔고, 나도 그런 느낌이다. 중용의 집기양단이란 어쩌면 양립하는 두 생각을 부여잡고 치우치지 않고 새롭게 나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책을 읽다보면 상당히 많은 선현들이 그런 노력을 했다. 그런 점에서 두 할배의 originality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라는 환경속에서 동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고방식에 대한 본질을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사물의 발전이 변화를 가속하며 그 현상에 착각할 뿐이지 사람들이 머리를 쓰는 본질적 방식은 기원전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할 즈음에 벌써 다 나왔던 것 같다. 4차 산업의 접근방식도 다르지 않다. 대상이 다를 뿐..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수 천년동안 이 모양 이 꼬라지일리 없다. 사기를 읽다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비슷하다. 제도가 좀 험악한 짓을 문명 발전이란 이름으로 제재할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름있는 학자들이 도가를 바탕으로 하지만 유교를 잘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고, 유교의 대표적인 학자중에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도가의 변증법처럼 서로 주고 받으면 동양의 철학사는 오랜 시간을 거치며 조금씩 변화로 인한 새로움을 담아 왔다. 이 책은 그 내용을 사마천의 사기와 유사하게 대표적인 이야기, 인물의 근원, 핵심 사상에 대한 이야기, 그 화두에 관해 생각해 볼 이야기 거리를 각 편마다 배치하고 있다.

예전에 왜 무위자연의 도가가 한비자와 같은 법가의 근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외우라고 하지 그 이유는 배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어른들이 나이들면 논어보다는 노자라고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나름의 생각이 생겼다. 인간 문명안에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극기복례와 같은 교육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면 인위적인 교육이 다시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이를 내려놓고 새롭게 배우거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무위무불위의 자연과 같은 순리를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내려놓기 위해서는 내려놓을 것이 있어야 한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며 삶을 정리하는 인간의 길을 또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확고부동하게 인간에게 적용되는 법칙을 모방에서 세상에 적용한 시도가 법가인것 같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야 깨달음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또 후세에 물려줘야 할 것이 있다. 시간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신화처럼 철학에서도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다.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너무 때에 맞지 않게 빨리 알아도,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도 인생의 풍파를 만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책을 읽으며 나의 생각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나는 서양철학의 좁고 깊은 길보다 동양철학의 넓고 높은 길이 더 맘에 든다. 서양처럼 치밀하지고 촘촘하지 않지만, 그들의 생각이 여기에 없는 것이 아니다. 조금 치환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과학의 시대에 필요한 실증, 고증의 분야는 필요한 부분에 적절하게 사용하면 된다. 다만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에 호기심을 갖기에도 인생의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아마 나는 청나라 후기의 실용과 절취부심의 마음일지 모르겠다. 또 앎의 부족함이 일상다반사가 되는 이유다.

책을 읽으면 재미있었던 구절들이 있다. 익숙지 않은 것들에서 골라봤다.

  1. 배휘의 질문에 대한 왕필의 절묘한 답

성인은 무를 체득해 알고 있었지만, 무란 무릇 말로 깨우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노자는 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항상 자신에게 부족한 무에 대해 말해왔던 것입니다

왜 노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왕필의 주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지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괜히 루신의 고사신편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노자가 살짝 공자에게 퉁을 주는데..

  1. 범진

형체는 곧 정신이고, 정신은 곧 형체다

퇴계와 고봉의 필담에 가담해서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의 토론에 참가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그의 생각처럼 형태와 정신이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안에 있다는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최근에 읽은 이기적 유전자(게으른 유전자)도 이 경기장에 오면 너무 지협적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1. 이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 곧 인륜이자 물리이다

책의 절반은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이란 문구를 안고 산다. 역사학에서 역사의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사가 있고, 모든 학문에는 학문의 역사가 있다. 철학사, 경제학사처럼.. 사기는 역사책이며 동시에 인간 문명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역사를 포함한다. 철학과 함께 역사가 인문학의 한 축을 장식한다는 이유를 책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양의 철학과 철학사는 사마천에게 큰 빚이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저녁마다 철학자의 삶이 행복한지 알 수가 없지만, 철학자들의 생각을 조금 나눠서 삶을 돌아보는 것은 재미와 의미가 있다. 조금 관심이 있다면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와 노자, 한비자, 장자를 읽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귀곡자는 잡서라고도 하지만 꽤 재미있게 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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