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하반기, 판문점의 정전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전쟁포로 문제 때문이었다. 마오쩌뚱은 전쟁포로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미국의 정전조건을 받아 들여 가급적 빨리 정전협정에 서명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미국 대항이라는 전세계적 전략에 입각해 다시 한번 마오쩌뚱을 지지했다
(이때 김일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측면에서 김일성을 중국과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만든 계기가 한국전쟁이 아닌가 한다)
북한은 가급적 빨리 담판을 끝내자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뚱에게 직접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않다”는 의견을 표시하기 까지 했다(410, 주148. АПРФ, ф.45, оп.1, д.342, лл.81-83)
라주바예프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보고했다
“김일성과 남일이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원인에 대해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습니다. 즉 반드시 정전협정에 성명하도록 제안해야하며, 해결되지 않는 모든 문제는 정치회담으로 이관해 해결방법을 모색해야합니다.
김일성은 미 공군이 지금 계속해서 조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있기 때문에 담판을 지연시키는 것을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포로 문제에 대해 계속 논쟁하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간파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논쟁들이 더 막중한 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김일성은 게다가 지원군의 대다수 전쟁 포로가 이전 장지에스 군대의 사람들이고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김일성은 남일에게 지시해서 이 문제에 대한 중국인의 생각을 확실하게 파악하라고 지시했으며, 리커농의 명의로 전쟁포로 문제에 대해 양보를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라주바예프는 한국전쟁 종결로 중국이 소련무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고한다
“조선전쟁의 종결로 대량의 소련무기 공급이 중단되거나 감소할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반대로 중국과 소련의 역량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조속한 휴전을 미룬 것은 소련으로 부터 충분한 장비를 얻기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비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다.)
5월 2일 정전회담 5개항중 4개항의 합의에 도달했으나 제4항 전쟁포로 처리에 관한 문제에서 미국은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 중국은 모든 포로의 송환을 주장했다.
북한지도자들은 5월이전에 미국과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이를 계기로 1952년 하반기 경제 및 정치업무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전쟁포로 문제로 협정체결이 지연되면서 실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