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국내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왓챠플레이에서 미국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을 릴리즈했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매번 정주행하는 나로서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시즌이 올해가 아닌 2019년에 방송될 것이라는 발표가 나를 포함한 전 세계 많은 왕겜팬들을 절망에 빠뜨렸지만, 이제 괜찮다. 왓챠플레이를 위안거리로 삼아 한해를 버티면 되니.
우리 남매는 [왕좌의 게임] 덕후다. 여섯 번 정주행 하다 보니 대사도 외우고, (자제하는 편이긴 하지만) 관련 굿즈나 원서도 구입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드라마 속 인물들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보기도 하고, 내 주변 사람들을 한 캐릭터에 빗대어 보기도 한다. 가령, 동생에게 모욕을 주고 싶을 때 "이 조프리 같은 놈!"이라고 한다던가..
동생은 덕질의 강도가 좀 더 하드코어인데, 자신을 한 마리 사자(라니스터 가문의 상징)로 표현하며 일생의 첫 타투로 라니스터 가문의 가언을 가슴팍에 새겼다. 그리고 칠왕국의 수도 킹스랜딩을 그린 촬영지인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까지 가서 왕겜 투어를 하고 티셔츠까지 사왔더랬다. 티셔츠를 넣어준 종이가방마저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두었다는 사실. 시즌6 포스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집 안을 활보하는 그놈을 보고 있노라면, 한심함보다 부러움이란 감정이 좀 더 앞섰다는 고백을 이 자리를 빌려해본다. 당시 킹스랜딩에 함께 가지 못했던 한(恨)은 2017년 8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풀렸다.
에든버러는 2008년 프린지 페스티벌(Edinburgh Festival Fringe) 이후 9년 만의 방문이었다. 당시 춘향전을 영어뮤지컬로 각색한 작품 [요춘향 Yo! Chunhyang]을 무대에 올렸는데, 세계 곳곳에서 온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튀기 위해 열심히 누비며 홍보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과 다시 에든버러를 찾은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많은 것들이 그대로였고 축제의 열기 또한 변함없이 뜨거웠다. 친구들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옛 추억을 공유하는 기쁨이 매우 컸지만, 밤이 되면 [왕좌의 게임]을 테마로 한 펍(Pub)에 갈 수 있단 설렘도 상당했다.
에든버러에 있는 선술집 팝업긱스(The Pop Up Geeks)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팝업스토어다. [왕좌의 게임] 뿐만 아니라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워킹데드 The Walking Dead]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주제 삼아 돌아가며 운영한다. 다른 작품의 테마도 분명 좋았겠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다행히 왕좌의 게임에서 영감 받아 만든 펍 '블러드앤와인(Blood & Wine)'이 운영되고 있었다. 건물을 찾기까지 약간 헤맬 수 있다. 당시 팝업긱스의 사이니지가 어디에도 없어 지나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신 'Blood & Wine'이라고 분필로 적힌 입간판이 피가 낭자하는 드라마 속 이미지를 연상시켰고,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웨스테로스(왕좌의 게임에서 그리는 가상대륙)라 적힌 비상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왕좌의 게임] 속 세상이 펼쳐진다.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옛 중세시대 의상을 입은 스태프들이 우릴 반기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각 가문들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의 깃발이 걸려있는 공간에 웅장한 음악이 들려오니 비로소 칠왕국에서 가장 훌륭한 술맛을 자랑하는 블러드앤와인에 온 것이 실감 난다. 한쪽 벽면에는 프로젝터를 통해 드라마가 계속 나오고 있었는데, 옆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흘긋흘긋 보거나 아예 대놓고 드라마를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이도 있었다.
발라리안 강철 검과 스타크 가문의 상징인 다이어울프 방패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전시되어 있다. 그걸 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애꿎은 와인만 홀짝이며 벽면에 붙은 나이트워치 선서문을 수줍게 읽어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용자가 나타났다. 한 아저씨가 검을 휘둘러보길래 옆에 다가가 멋있다고 추임새를 넣은 뒤 아주 자연스럽게 건네받았다. 출처가 이케아(IKEA)로 추정되는 러그를 망토 삼아 어깨에 두르고, 발라리안 강철 검을 든 뒤 비장한 표정을 지어본다. "Queen in the North!"를 외치는 북부인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 환청이야-)
이케아 러그만 있으면 우리 모두 북부인이 될 수 있다. ⓒ IKEA
"Everything’s better with some wine in the belly."
— Tyrion Lannister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블러드앤와인의 메뉴판. 드라마 속 도시의 이름과 특성,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모티브로 한 술과 음식들이 메뉴판을 정독하게 한다. 내가 주문한 것은 가장 인기 있다는 레드와인 'The Imp's Delight'. 작은 악마 임프(Imp)로 불리는 난쟁이 티리온 라니스터(Tyrion Lannister)가 소유하고 있는 캐스털리락(Casterly Rock)의 포도농장에서 수확한 포도주다. 칠왕국에서 제일가는 미식가일 것만 같은 티리온이기에 주문해도 실패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왠지 모르게 강하게 들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리텔링의 힘이 이렇게 강하다. 고작 메뉴판 하나로 감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장벽(The Wall)에서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마시는 뜨겁게 덥힌 향료주 'The Old Bear's Hot Spiced Wine'부터 로버트 바라테온(Robert Baratheon)이 좋아했던 도른(Dorn) 산 레드와인, 그리고 볼란티스(Volantis) 산 스위트와인까지, 왕좌의 게임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메뉴 이름으로 풀어내니 실제 킹스랜딩의 한 선술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리아 스타크(Arya Stark)가 왈더 프레이(Walder Frey)에게 선사했던 프레이 파이(Frey Pie)도 있는데, 실제론 소세지롤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이 아들들의 가장 신선한 부위로 만들었다'는 문구를 보고는 차마 사 먹을 수 없었다.
팝업긱스는 2018년 2월부터 4월까지 믹솔로지(Mixology) 칵테일바 'Perilous Potions'를 운영한다. 칵테일을 마법의 물약처럼 말아(?) 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영국의 아동문학가 에디스 네스빗(Edith Nesbit)의 1912년 소설 [The Magic World]를 테마로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해리포터의 마법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전체적인 디자인부터 시작해 지팡이, 마법의 묘약 등의 요소들이 해리포터를 연상시키고, 실제로 구글링을 해보면 많은 이들이 해리포터 테마의 칵테일바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팝업긱스는 그 어떤 홍보 채널에도 해리포터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자인가..) 이는 분명 저작권 문제 때문이리라.
블러드앤와인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도대체 이들이 HBO와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지부터 궁금했었다. 그러나 팝업긱스는 드라마 제작사인 미국HBO나 조지 R.R. 마틴(George R.R. Martin)의 원작 소설인 [얼음과 불의 노래 A Song of Ice and Fire]와 연계해서 진행하는 공간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오로지 드라마로부터 영감을 받아 순수한 팬심으로 진행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아무래도 이벤트성의 팝업스토어로 진행하면 저작권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 같다. 서울에 이런 공간 만들려면 저작권 때문에 머리 아프니, 그냥 우리 집에서 하루 날 잡고 왕겜파티를 해야겠다. 입장할 때 암호는 '발라 모굴리스(Valar Morghulis)', 그리고 '발라 도하에리스(Valar Dohaeris)'.
- The Pop Up Geeks
Add. Arch 14 E Market St, Edinburgh EH8 8FS, UK
Tel. +44 742 929 9885
Web. http://www.thepopupgeeks.com
Open Hours. 매일 12:00-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