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홍성군 홍동면 원천리에 ‘열녀(烈女) 난향(蘭香)의 묘’가 있다. 마을에서 ‘무지개말랭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산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시대 기녀의 묘이다.
난향의 묘 앞에 서있는 비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녀 난향은 평양기생으로 황규하(黃奎河)의 애인이었다. 황규하는 1678년에 태어나서 1718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1713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응교, 사헌부집의, 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71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홍주로 귀향하였고 1718년에 사망하였다.
황규하는 아버지 황흠이 평양감사로 재직할 당시에 책방도령으로 따라갔었다. 난향은 규하가 평양에 머물면서 사귀던 기생이었다. 아버지 황흠이 다시 한양의 내직으로 등용되어 상경하게 되자, 규하와 난향은 작별하고 그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후 관리들의 수청요구가 거세어지자, 난향은 자결을 결심하고 대동샘에 투신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마을사람들이 물을 긷기 위해 두레박질을 하는데 물이 퍼지지 않았다. 날이 밝은 후에 우물 속을 살펴보니 사람이 빠져있는데 물이 말라 있었다. 사람을 건져 올려 보았더니 난향이었고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난향을 건져올리자 말랐던 우물이 다시 솟아올랐다.
이후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다시는 관리들의 수청요구가 없었다. 그후 난향은 낭군의 소식을 기다리며 수년을 살아가다가 갖은 고생을 각오하고 한양으로 규하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규하는 이미 벼슬을 사임하고 이곳 홍주로 낙향한 후였다. 난향은 한양에서 다시 홍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백 리를 걸어온 난향은 발이 부르트고 유혈이 낭자하여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난향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찾아온 규하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있었다. 난향은 주위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서 규하의 묘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난향은 시묘살이 얼마 후에 규하의 묘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람들은 난향의 행동에 너무 감동하여 규하 옆에서 영원히 함께 있기를 바랐다. 비록 저승에서나마 낭군과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며 쌍분으로 나란히 묘를 썼다.
세월이 흐른 후에 규하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해 갔고, 난향의 묘는 홀로 남게 되었다. 규하의 유골이 언덕 아래로 운구되어 갈 때, 난향의 묘에서 갑자기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상여를 뒤따라갔다.
사람들은 난향의 영혼이 무지개로 변하여 규하를 따라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후 이곳 언덕배기는 난향의 이야기와 함께 ‘무지개말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규하의 후손은 이후로 대가 끊겼다고 한다. 이곳에 홀로 남게 된 난향의 영혼이, 후손들의 야속한 행동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난향의 묘는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해방 후부터 이곳 창원황씨 문중에서 매년 벌초와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93년에는 후손들의 뜻을 모아 난향 묘 앞에 제단과 비를 세우고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있다.
이상이 홍동면 원천리에 있는‘열녀 난향의 묘’에 대한 묘비의 기록이다. 이상의 내용은 홍성지역에서 구전과 기록 등으로 전설이 되어 전해오고 있다.
위 비문의 기록 중에서 아쉬운 것은 주인공의 이름과 활동무대가 실제와 상이한 점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난향(蘭香)’이 아니고 ‘만향(晩香)’이며, 그가 활동했던 곳은 평양이 아니고 함흥이었다.
황규하의 아버지인 황흠은 평양감사를 역임한 기록이 없다. 황흠의 여러 관직 기록 중에는 세 지역의 관찰사 기록이 있다. 전라도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1702년 봄부터 1703년 가을까지는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황흠이 함경감사를 역임했다면, 그 임지는 함경도 함흥이다. 함경감사를 역임하며 함흥에 머물렀고, 이때 막내아들 황규하가 책방도령으로 따라가서 기생 만향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황규하와 기생 만향의 일화는 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1926년에 발간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기록되어 전해온다. 또한 조선 시대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함경남도 함흥부 읍지(咸鏡南道咸興府邑誌) 열녀(烈女)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활동무대와 이름의 착오는 왜 생겨난 것일까. 아마도 문중에서 300여 년 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던 내용을 정리하면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홍동면 원천리에 있는 비문 내용은 ‘열녀(烈女) 만향((晩香)의 묘’로 수정되어야 맞을 것 같다.
조선시대 신분을 뛰어넘는 기생 만향의 사랑이야기와 그녀의 묘가 우리고장에 전해온다는 것은 훌륭한 문화유적이 아닐 수 없다.
© 홍성신문(www.hs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