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2018년 순식간에 다가온 그의 죽음에서 삶의 태도, 정치에서 새로운 윤리를 떠올린다.
사회적 도덕 규범에 의하면 윤리는 개인이 공동체에서 지켜야하는 선택이다. 항상 삶의 형태를 지킨다 하더라도 윤리에 따른 가치 판단 기준은 개인을 옭아맬 뿐만 아니라 규범에 규범에 의한 법적 판결에서 예외를 발생시키는 아포리아이다.
어떤 정치 집단은 정치공학적으로 목적에 부합하는 명분으로 도덕적 잣대에서 자유롭다. 반대로 이를 비판하는 정치 세력은 엄격한 도덕을 지녀야한다. 그것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삶의 태도를 위한 정치적 윤리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부패한 기득권이라면, 후자는 삶의 형태를 지향하는 진보이다. 여기서 진보는 더 나은 도덕의 딜레마에 부딪친다. 도덕에 대한 결벽증과 윤리의 엄격한 잣대의 요구로 정치적 영역 활동의 제약을 심각하게 받는다. 왜 기득권은 부패에 자유로우며, 반면에 진보는 엄격한 잣대에 스스로 갇히는가? 그들의 엄격성으로 정치의 과실은 모두 기득권에 돌아가는가? 이런 질문 이전에 선과 악에 따른 윤리적 판단의 근본을 물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과 악의 물음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많은 질문을 해왔던 익숙한 주제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혼돈(CHAOS)의 존재이다. 혼돈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유아기를 거쳐 관계를 맺으며 윤리의식을 지닌다. 인간이 혼돈의 존재라면 윤리는 존재(~being)가 아니라 소유(~having)이다. 인간은 언제든지 윤리에 벗어날 수 있는 카오스의 존재이므로 도덕적 규범의 잣대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기득권의 가치판단 기준이다. 이런 판단 기준은 모든 집단에서 적용되고 최종적으로 법정립적이다. 그래서 권력을 지닌 기득권은 권한을 누리며 도덕적 기준을 만들며 개인적인 선택의 윤리를 강요한다. 벤야민의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은 권력 유지 수단과 가치판단의 기준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폭력적 순환을 설명한다. 이런 순환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윤리는 인간의 카오스적 존재의 새로운 윤리를 정립하는 어쩌면 신적 폭력의 범주일 수 있다.
벤야민의 예외상태를 새로운 삶의 형태로 승화시키는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에서 삶의 형태의 철학을 내세운다. 그가 말하는 잠재성은 존재가 '~를 하지않을 권리'와 '~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이다. 아감벤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가 말하는 I would prefer not to에서 '~하지 않는' 모든 행위를 중지시키는 태도를 비잠재성이라 칭한다. 여기서 새로운 윤리의 형태를 끌어오고자 한다. 기득권을 위한 도덕적 규범의 판단 기준의 연쇄 고리를 중지시키는, 도덕적 결벽증으로 인해 정치활동의 잠재성을 박탈하는 비판적 정치세력을 위한 윤리이자, 구원없이 판단으로 결정하는 법정립적 폭력의 좌표를 살짝 비트는 윤리적 행위이다.
새로운 도덕적 윤리의 기준은 존재의 잠재성을 박탈시키는 행위의 여부에 있다.
최근 가장 논란의 사건은 공기업과 공무원의 채용 청탁 비리였다. 강원랜드의 채용자 대부분이 정치인과 지역 유지의 채용 청탁과 그 과정에서 거대의 청탁금이 오갔었다. 이는 낙하산 공공기관장, 정치인, 지역사회의 순환고리인 총체적 비리이다. 채용비리 수사 진행 결과 이미 회사를 다니는 채용자들은 채용 취소로 해고될 것으로 발표가 있었다. 엄격한 조사와 추가 징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미진했다. 청탁에 연루된 몸통 정치인은 국회의원 면책 특권으로 버티는 중으로 끼리끼리 기득권은 법보존적인 예외에서 처벌을 피하는 중이다. 더 중요한 요점은 그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 사실이다. 법의 힘을 빌려 사건은 질질 끌릴 것이고, 누구도 처벌되지 않는 현실의 망각 속에 묻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뻔뻔한 것은 대중이 좌절보다 기득권의 권위를 찬양하며 우러러 보는 법보존적 순환을 강화시키는 자양분인 보수화의 자양분의 씨앗을 태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정치인들의 도덕적 책임은 더 크게 물어야 한다. 그들의 비리로 인해 탈락한 이들의 잠재성은 박탈됐다. 비록 채용을 다시 하더라도, 그들이 빼앗긴 잠재성과 시간은 무엇을 보상할 것인가. 그리고 채용 비리로 부패를 정당화 하여 사회적 영향을 준 가해자는 다수의 더 큰 잠재성의 박탈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판단을 뛰어넘어 잠재성이라는 새로운 윤리 기준으로 판단하면, 판단의 부재를 중지시키며 새롭게 피조물을 구제하는 삶의 형태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