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를 읽고, 이걸 쓸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벌써 글이 올라와있더군요.
@littleglove님의 글 링크입니다.
https://www.steemzzang.com/sago/@littleglove/6
제 글이 불편하시거나 너무 길어서 읽기 싫으신 분들은 링크타고 가시면 됩니다.
윤C 요약 3.
책<달과 6펜스>는 제목과 달리 예술과 인생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예술)을 위해 이전의 삶을 모두 버리고 오직 그림에만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예술, 정신적 가치는 무엇일까?
스포일러 가득
<달과 6펜스>는 신기한 소설입니다. 쓰여진 시기와 주인공의 성격, 예술을 위해 포기한 삶이 파격적이고 주변인물들의 행동과 성격 또한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트릭랜드는 '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 개성이 강한 인물입니다. 40대의 평범한 가장입니다. 런던의 증권 거래중개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예술가와 어울리기 좋아하는 교양있는 부인이고 딸과 아들도 그저 평범합니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은 스트릭랜드가 남긴 편지 한통입니다. 바로 가족을 떠나고 이제부터는 예술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는 아내와 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고,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본 동료 화가인 '더크 스트로브'의 가정도 파탄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세속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혼을 담은 예술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p71
나: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는것처럼 보이는데요.
스트릭랜드 :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소.
'그는 가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로지 정신적인 삶만을 추구했다.'
스트릭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배에 오르고 남태평양의 외딴 섬 타히티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예술의 끝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문둔병에 걸린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런 독특한 성격과 놀라운 재능을 지닌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스토리 설명은 여기까지합시다.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를 집필하여 일약 세계적인 작가롤 발돋움합니다. 1919년 작품으로 당시는 세계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이듬해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소설 덕분에 몸은 4년 전에 집필하였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도 새롭게 주목받았죠.)
당시 이 작품은 전쟁을 겪고 피폐해진 젊은 세대에게 자유와 순수에 대한 동경을 품게 했다고 합니다. 실존 화가인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소설입니다.
폴 고겡은 19세기에 활동했던 인상파 화가입니다.
인상파는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사의 한 흐름입니다. 고갱은 인상파를 계승하지만 반대로 불만도 드러냅니다. 서구 문명이 축적한 근대적인 학문과 예술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그는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가치를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또한 타히티 섬에 정착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이 소설은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제목인 달과 6펜스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소설 내내 제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많은 독자들이 '왜 달과 6펜스지?' 하고 궁금증을 가진채로 책을 덮습니다.
6펜스는 1971년까지 사용되던 영국의 은화입니다. 1파운드가 100펜스이니 6펜스는 그리 크지 않은 돈입니다. 달과 6펜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빗나지만 속한 세상은 다릅니다.
달은 하늘에 있고 6펜스는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즉, '달의 세계'와 '6펜스의 세계'는 대립을 이룹니다.
형식적인 관계만 남은 사교계를 기웃거리는 사람들
돈이 될 그림에만 집중하는 스트로브
애정에만 집착하는 블란치는 6펜스의 세계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창작에만 몰두한 스트릭랜드의 삶은 달의 세계에 있습니다.
몸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속물적인 모습을 간결한 대비로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걸까? 진심으로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연봉 일만 파운드에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의사로 사는 것이 성공한 인생일까?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달과 6펜스>는 서머싯 몸의 '예술론'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예술가의 영혼이 온갖 괴로움을 다 겪으면서 만들어 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오. 그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알아보는 것은 아니지.'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습니다.
흔히들 기회비용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꿈을 위한 삶과 지금까지 이뤄논 삶을 선택하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마치, 예술을 위해서라면, 꿈을 위해서라면 세속적인 모든것을 내려놓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과 소통하면 그 사람 안에도 나를 심는다고 합니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을 위해서 다른이들에게 심은 자신의 씨앗들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죠.
하지만 마지막에 스트릭랜드 전부인의 태도를 통해서 제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전부인은 스트릭랜드가 가정을 버렸을 당시는 비관과 비판으로 스트릭랜드를 평가했지만 사후에 유명한 화가가 되자 태도를 바꿔버립니다. 마치 그 어려운 시절이 트로피를 위해 당연히 필요한 고난의 시절이라도 되는듯이요.
제가 <달과 6펜스>를 읽고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는 사람들의 속물적인 본성을 비판하기위해 숫자로 사람을 파악하는 장면을 넣습니다.
하지만 이런말도 있지요.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될 수 없다.'
숫자는 간편하고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필터입니다. 그래서 자주 감성에 비교당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통해 나름의 결론을 얻었지만 여러분에게 묻고 싶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은 각자 기준이 다릅니다. 그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의 순위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처럼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욕망에 충실한 사람은 비난받아야 하나요? 아니면 위대한 결과과 과정도 미화되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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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삶이 비판받는 이유는 도덕, 자애와 같은 순수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회성을 통해 배운 사람의 삶이 사실 세속적인 모습이지만 인간 스스로 인지부조화를 겪는 양심의 선언일까요? |
예술의 가치. 질문을 확장해서, 인간 정신의 발전과 방향성을 향한 예술은 현재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요? |
욕망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 음... 나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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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시소의 양 끝에 있으시군요.
보통은 균형을 위해서 폭을 넓히고 다양한 조건들을 열어놓습니다. 그래서 기회비용도 다양하고 아쉬운것도 많지만요.
무엇을 위한 삶인지 개인 기준에 따라 욕망을 조절하거나 포기하고 선택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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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건 중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반반무마니는 진리라는 말도 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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