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이소룡

in zzan •  5 years ago 

1973년 7월 20일 이소룡 사망

<특명 아빠의 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할 때의 일이다. 동료 PD가 ‘목검으로 촛불 끄기’ 과제를 어떤 아빠에게 전달했다. 무척 재미있는 괴짜 공무원 아저씨였던 특명 아빠의 좌충우돌 과제 수행기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포복절도를 했다. 갑자기 이 아저씨가 노란 쫄쫄이를 입고 나와서 온 방안을 설치고 다닌 것이다. 물론 PD가 의상실에서 빌려간 옷이었지만. 그런데 80년 이후 태어난 작가가 깔깔거리며 “이소룡!”을 환호했다. 어 당신이 이소룡을 어떻게 알아. 그 작가 또한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이소룡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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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란 쫄쫄이는 그의 마지막 영화이자 미완성 작품인 <사망유희>에서 입고 나온 것이다. 가깝게는 영화 <킬빌>에서 여자 주인공이 입고 나와 온통 주변을 피바다로 만드는 바로 그 옷이다. 그의 마지막 의상이어서 그런지 노란 쫄쫄이는 그 사망 이후로도 오랫 동안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로 남아 있다. 그 이소룡이 1973년 7월 20일 급작스레 사망했다.

내가 세 살 때 죽었으니 그를 기억할 일이 없다 싶지만 나는 그의 영화를 대여섯 살 때 보았다. 어떤 작품인지는 모르나 선명히 뇌리에 남아 있는 장면은 악당의 부하들이 그라운드에 집결해 시범을 보이는데 이소룡이 냉소를 흘리며 지나가는 장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듯 카리스마가 잔뜩 배어나던 그 모습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 아이의 머리 속에 깊숙이 와 박힌다. “아뵤~~~”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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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래서 이소룡이 반 한국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와 한국과는 별 인연이 없다. 그가 죽은 후 대역이 한국인이었다는 것 정도. 그 아버지는 유명한 경극 배우였고 어머니는 독일인과 중국인의 혼혈이었다. 태어난 건 샌프란시스코였지만 태어나자마자 홍콩으로 이사간 부모 때문에 홍콩에서 자랐고 거리에서 유명한 싸움군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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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뭉치를 보다 못한 부모는 이소룡을 미국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접시닦이 등 온갖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워싱턴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다. 동시에 그 기간 동안 꾸준히 무술을 익히고 몸을 단련했던 그는 단순한 액션배우나 무술가를 넘어선 철학을 지닌 무도인으로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홍콩으로 돌아간 뒤 그는 <당산대형>으로 아시아 전체의 히어로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그는 그 자신이 창시한 무술 절권도를 맘껏 발휘하며 인기를 끌어모은다. 당시 홍콩에서 19일만에 3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 당시 흥행 1위를 지키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아성을 허물어버릴 정도였다. <정무문>에서는 그 특유의 ‘아뵤’와 쌍절곤이 선보였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지난 세월 서양에 채이고 일본에 밟혔던 중국인들의 콤플렉스를 유감없이 깨부순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두한이 마루오카를 제압하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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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과 개 출입금지’라고 적혀있는 공원 간판을 붕 날아올라 깨부수고,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환자라는 뜻으로 중국인을 깔아뭉개는 표현) 액자를 들고 가서 일본 무술인을 찾아가 박살을 낸 뒤 그 동아병부 종이를 구겨 입속에 넣어 씹어먹게 하는 이소룡에 중국인 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열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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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액션배우가 아니라 실제 무술인이었던 바 <용쟁호투>에 출연한 엑스트라들은 실제 주먹깨나 쓰는 거리의 불량배들이었다고 하며 이소룡은 그들을 상대로 연기(?)를 펼치며 그들의 기를 꺾어 ‘따꺼’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출연한 엑스트라 가운데 한 사람과 연기를 하다가 이소룡은 그를 잘못 때려 큰 부상을 입힌다. 이소룡은 이를 거듭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다른 영화에 출연을 주선하고 감독들에게 소개하며 미안함을 전하는데 후일 이 엑스트라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고 자신의 은인인 이소룡을 잊지 못한다고 술회하게 된다. 그 엑스트라의 이름은 성룡이다.

당시 헐리우드에서 먹어 주는 대배우가 엑스트라의 부상에 그렇게 미안해하고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점에서 이소룡의 인품을 짐작케하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진할 것이다. 비록 내가 품은 모든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언젠가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모든 성의와 능력을 다 바쳐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고 외친 그의 말이 씨가 되어서일까 죽음은 정말로 홀연하고도 급작스럽게 그를 찾아갔다.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대량의 대마초 성분이 발견됐다고도 하고 훗날에야 그 병명이 드러나는 ‘돌발성 간질’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합회가 죽였다고도 하고 복상사라고도 하는 그의 최후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그는 홀연히 나타났듯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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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지 40년이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들의 인터넷에서 ‘싱하형’으로 살아 있고 코흘리개들도 자기 코를 튕기며 내는 ‘아뵤’ 소리로 생생하며 노란 쫄쫄이를 입으면 지가 무슨 이소룡이라고 하며 던지는 농담 속에 죽지 않고 있다. 이소룡. 브루스 리가 1973년 7월 20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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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일대기 다큐를 본 기억이 어렴풋 나네요. 성룡이 그 덕분에 출세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