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耽)은 즐긴다는 뜻입니다. 귀 이(耳)에 나아갈 임(冘)이니 귀가 무언가로 자꾸 향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노래나 내 귀에 달콤한 칭찬이나 사랑의 밀어나 자극적인 스토리, 그런 것에 우리 탐! 하는 것이겠지요?
탐독(耽讀)-어떤 글을 좋아서 읽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책은 탐독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탐독은 중독성 있는 책들을 탐하는 것을 뜻하지요.
오늘 이모저모 살피려는 단어는 탐닉(耽溺)입니다.
닉(溺)은 빠진다, 오줌 등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자를 잘 알지 못한다해도 그 느낌은 알 수 있잖습니까? 어떤 느낌인가요? 탐닉!
탐(耽)은 감각적 쾌락에 쏠리는 것이고 닉(溺) 역시 더러운 데 빠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빠져서 죽는 것을 익사(溺死)라 합니다. 어쩌면 탐닉의 끝도 죽음 아닐까요? 섬칫해지네요.
탐닉(耽溺)-오늘 이 단어를 떠올린 것은 새벽 고요한 시간이었습니다.
허공이 툭 던져주는 주제-이것을 받아서 저는 이렇게 문자인문학 글을 씁니다.
아마도 저 자신에게도 그렇고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이 주제는 상당한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몸만 연로해졌고 정신은 아직도 젊은 많은 분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탐닉했던 것들을 추억해 봅니다. 술, 담배, 색심, 바둑, 게임…그리고 좀 더 미세하게 들어가면 스포츠, 정치, 유대감…칭찬…인정…
우리 속인의 삶은 탐닉의 연속이 아닐까요? 마치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벌나비와 비슷하겠지요. 식탐은 술을 부르고 술이라는 탐닉은 담배라는 구수한 탐닉을 부르며 그 다음은 드라마나 색욕이라는 가슴 뛰는 탐닉을 초래하곤 합니다. 그러면 이런 삶, 쾌락을 지향하는 삶은 유쾌 상쾌한 것일까요? 탐닉이라는 흥분 상태는 반드시 그 반대 상태-권태와 우울의 반동으로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양극단에서 요동치는 인생은 늘 뭔가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구-자체가 이미 치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추구하는 이, 탐닉하는 이는 늘 안정되지 못하지요.
젊은이여! 언제부터 그대는 탐닉했는가? 무엇이 결핍되어 탐닉을 추구했는가?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그들은...어느덧 탐닉을 뺀 인생, 그 거대한 빈 자리가 두려워집니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래도 올망졸망 탐닉할 게 있어서 살만 했는데…’
탐닉을 들어낸 자리-그 자리가 꼭 공허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결핍이나 허무는 더욱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