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ganjingworld.com/video/1h8344dsruq1Ov8vX8khrrLvp1vg1c
얼씨구 절씨구라는 이 익숙한 타령은 각설이 타령에 나오는 문구라고 합니다.
얼시구 시구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이 문구는 단순한 추임새일까요? 아니면 어떤 내포가 있을까요?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해석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각설이 타령의 각설(覺說)은 깨달은 자의 말이라는 의견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의 해석입니다.
얼씨구(蘖氏求)’는 세상에서 멸시당하는 서자(庶子)의 씨라도 구해야 하겠다는 뜻이라네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난리통에 남자가 씨가 말라서 그렇다는 식인데요. 또 절씨구는 당시 천대받던 절에서 중의 씨라도 구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글쎄요. 그렇다면 그 타령은 여성이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그 타령은 남자가 한단 말입니다? 또 각설, 즉 깨달은 사람이 세상에 회자되도록 할만한 가사는 영 아닙니다.
이런 경우 너무 한자로 꿰어 맞출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제가 좀 더 직관적인 풀이를 들어가봅니다.
얼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흔히 영혼이라고도 하는 내 본래의 주인자리입니다. 원신이라고도 하지요. 한글로 ‘얼’은 안(ㅓ)으로 깃든 생명(ㅇ)의 기운(ㄹ)입니다. 육신을 뒤집어쓰고 이 물질계에 온 우리는 보통 관념에 머리가 칭칭 감겨서 본래 얼을 아득히 잊고 삽니다. 심지어 자신이 얼이라는 것을 잊고 이 육체가 자기라고 믿고들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부처나 신이라 해도 이런 사실을 명백하게 세상에 설하고 다니면 그건 안된다고 합니다. 답을 주고 시험을 치르는 건 깨달음이 오지 않기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이나 가르침도 살짝 비틀어서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각설이 타령이라는 형식으로 길에서 거지모양을 하고 이런 알듯말듯한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것이지요. 예로부터 거리에서 아이들 입을 통해 예언이나 천기를 살살 녹여내는 방식이 유행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자기 본래 주인인 얼을 묻어두고 가짜 나, 즉 후천적 관념이 자꾸 쓰이면 점점 자신은 미혹의 늪으로 빠져들어갈 것입니다. 얼을 쓰고 살아야 합니다.
내 본연의 얼이 쓰이면 그 역량은 광대하며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얼씨구 좋타! 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나 혼자만 얼 쓰고 사는 것은 좀 아쉽습니다. 주변의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도 다 속에는 그 빛나는 얼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저 사람들의 얼, 그게 저 얼입니다. 저얼씨구!
밖으로 헤매고 다니던 우리 기나긴 얼의 여정은 이제 반대로 유턴을 해야 할 때입니다. 많이들 거론하듯이 지금이 말겁이며 말법시대 라 하지요.
속으로, 내 근본의 고향으로 그 참된 자리로 돌아가야하지요. 얼 씌구 씌구 돌아간다~ 저얼 씌구씌구 돌아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그 작년은 전생일 수도 있고 더 길게 보면 사전문명일수도 있을 겁니다. 그 옛날에 세상을 구도하던 그 품바-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단 말입니다.
당신의 얼은 안녕하신가요? 우리 서로의 얼이 비친 골짜기, 얼골을 보며 인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