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중해 사람에게는 하늘이 칙칙하게 느껴지는 10월의 어느 날 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도록 초대받은 '아랍인'이다. (pp.51)
책의 첫 문장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결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말 그대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책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그림이 왜 그리도 외설적으로 느껴지는지(내가 생각하기에는 피카소보다 더 외설적인 그림이 많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왜 그렇게 성적인 표현에 집착하는지도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더부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자가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 순간부터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미지를 대하는 극명한 차이, 그 차이로부터 시작되는 상이한 표현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그저 작품으로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아왔던 나와는 다를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아랍의 문화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아랍과 본 글에서 서양을 대표하는 피카소가 대립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편견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조금 더 편하게, 두 문화를 이분법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저자 자신이 그 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아랍의 문화에는 이미지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영역이라는 점이었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내용을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특히 아랍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해 더욱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믿음과 그렇기에 어디든 존재한다는 깊은 신앙심이 그들의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것이다. 그 점이 아랍인들에게는 함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금기를 야기하였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피카소의 작품들은 작품 그 자체의 의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피카소 작품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에서부터 저자는 피카소가 작품을 그려나갔을 방식에 대해 면밀하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책에는 피카소의 <꿈>이라는 작품이 나온다.
피카소의 <꿈>.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린 그림 중 하나라고도 하는 이 작품을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리 관능적이라고 느끼지 않았었다. 그저 아름답다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그제야 작품의 대상이 마리 테레즈라는 피카소의 어린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그녀가 잠든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제야 이 작품에 담긴 피카소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그 예민함이 발현된 이면에는 진정 아랍의 문화만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쉬이 100%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아랍인의 눈으로 피카소 그림을 본다는 표현은 책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꽤 큰 줄기를 그려주었다. 피카소 그림의 선, 색, 그리고 양감까지 그것들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백그라운드가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새삼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나체를 그려내는 서양의 과감한 표현은 감춤의 미덕이 통용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피카소의 작품들과 대면하며 느낀 감상과 고뇌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풀어낸 책 <여자를 삼킨 화가, 피카소>. 얕은 나의 지식으로는 내용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야기했던 책의 표지만큼이나 강렬한 빨간색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