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폭탄steemCreated with Sketch.

in cahier •  6 years ago  (edited)

폭탄
스테판 들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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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영화를 두고 에스쁘리로 다가오는 단 하나의 말은 " 그것은 가능하다" 이다. 가장 최근에는 레오 까라의 <홀리 모터스>를 두고서 그랬다. 지금은 <릴 퀸퀸>이 있다. 아니다, 브루노 뒤몽만큼 진지한 시네아스트가 근래 들어 가장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마치 모든 것이 월등한 수준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은 양 시네아스트가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바뀐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갑작스레 베르히만, 안토니오니, 드레이어, 타르코프스키의 코믹 영화를 보는 꿈을 꾸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깊숙한 프랑스라는 나라에 닻을 내린 인물들이 잘못된 비웃음을 위해 연기하는 것이 없는 지점에서 관객을 웃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칸 영화제에서 이 시네아스트의 영화는 언급했듯이 작가주간에 소개되었다. "기분좋게 웃으세요!" 말하기를 종종 거부하는 이 영화가 이처럼 미쳐 외워 기억하는 초현실주의적 텍스트를 낳는 일은 불가능하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정원사였던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함 없이 역할을 다양하게 연기했던 베르나 프루보스트가 세상에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최고의 코믹 배우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건 말도 안된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 전부다.
<릴 퀸퀸>은 폭탄이다, 거부할 수 없는 폭발적인 코믹함 때문만이 아니라, 작가의 다이나마이트같은 폭발력을 가진 위치감 때문이 기도 한데 상업적 토대들을 지배하면서 약소국의 모든 왕들을, 벌거벗은 채 환심을 사려는 모든 잘못된 대담함과 희미하게 소극적인 태도를 비웃는다. <릴 퀸퀸>에서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네아스트는 단호하고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프로젝트의 감행을 위해서 그 이상으로 어떤 자신감을 가져야 할까! 이처럼 엉뚱한 도박에도 시네아스트를 추종한 아르테에게 박수를 보낸다. <릴 퀸퀸>은 3시간 20분의 네 개의 티브이 에피소드 시리즈물이지만 반음조 내린 것이다. 우리는 대중의 웃음 속에서 이러한 취급을 보는 경험을 하고 이러한 보폭에서 나온 영화적 버전(단 하나의 차이는 씨네마스코프 형식)을 좋아하게 됐다. 이는 최근 칸느 영화제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다. 까이에가 또 하나의 대담한 시리즈물인 에릭 주도의 <플라탄느>를 커버 기사로 낸 지 딱 일년 되었다. 텔레비전은 이처럼 기발한 프로젝트들의 탄생을 계속해주기를 바란다! 이에 더해서 프랑스 영화 전체의 어떤 지점에서 종종 아카데미즘적인 경향을 띠는 것은, 그처럼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프로젝트들의 부식토와도 같다. 이 반응으로 프랑스 영화는 <홀리 모터스> 그리고 <호숫가의 낯선 사람들> 이후 그 해 최고의 영화를 삼 년이나 연속 차지하는 일은 가능한 것 같다. 누군가가 환각적인 <릴 퀸퀸>의 영예를 빼앗아갈 것 같진 않다.
스타와 함께 만든 첫번째 영화, <까미유 끌로델 1915>이 개봉한 지 일년 지난 후의 시도와 성공이기 때문에 브루노 뒤몽에 대해서 말하자면, 마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듯하며 그의 다음 영화도 코미디가 될 것이다. <릴 퀸퀸>에서 풍경, 대지에 떨어지는 시선의 연결과 배우에 대한 경이로운 관심 같은 그의 화면틀에 대한 놀라운 감각이 견지된다. 그리하여 그는 너무 심하게 누르거나 부각하면서 그의 영화들을 납으로 다지는 어떤 자발적 의지를 벗어 던지게 된다. 그는 가벼움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바뀐 것은 없다. 다른 시리즈 영화들처럼 세상에서 휴머니즘을 대체하고 악의 부조리함에 맞서다가 점점 진정이 되는 비극을 향하는 것이다. 브리소나 퀴로디조차 그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펼치고 있다. 뒤몽에게 있어서 거기엔 항상 열린 순간 혹은 얼굴이 있다. 그것은 풍경의 약속이다. 그리고 인간은 땅을 향하는 신호를 할 뿐이다. 거기에서 그의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어쩔 수 없는 형상이, 혹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다. 카메라는 뒤이어 그가 세상의 미스터리, 세상의 아름다움이라 말하는 주관적 시점뿐만 아니라, 이 시선의 아름다움과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릴 퀸퀸>의 마지막 세 개의 기획에서 두 개의 얼굴은 차례차례 같은 방향을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보는 이 두 가지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그들이 전체를 함께 본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거기 있고 그것을 보며 악의 마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데 다시 말해 우리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든 있거나 땅 위에 있다.

까이에 뒤 씨네마, 703호,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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