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쉼 없이 새로운 사건과 인연을 부딪치며 과거와 현재의 의미를 재구성하므로 마지막 숨을 쉬고 나서야 한 인생의 총체적 의미가 수정 없이 완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의미를 좌우하는 막중한 단어가 있다. 사랑, 꿈, 마침내 죽음.
픽사의 새로운 장편 애니메이션 '코코'는 사랑(가족애)과 꿈(가수)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유려하게 그려내면서,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아이들이 많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죽음은 늘 기피됐다. 애니메이션은 부활의 기적을 태연자약하게 용인하는 장르다. 현실 세계라면 절대 되살아날 수 없는 정도로 치명상을 입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주인공이나 악당이 애니메이션에는 무수하다. '톰과 제리'의 극악한(?) 폭력성을 떠올려 보라. 그런데 '코코'는 시간적 배경을 멕시코의 중요한 명절 '죽은 자들의 날(Day of the Dead)'로 설정한 것도 모자라 대놓고 해골바가지들이 주인공이다. 파격이다.
물론 '코코'는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해골에게도 눈은 남아 있어서 친근하다. 눈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람의 인상에 매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눈이 작은 필자는...(이하 생략)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이승과 저승이 등장한다. 저승에 살고 싶어 질 만큼 '코코'에 등장하는 저승의 비주얼은 가히 환상적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비록 서로 감각할 수는 없지만 '죽은 자들의 날'을 통해 함께 한바탕 축제를 즐긴다.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다리 하나로 단축될 때, 픽사의 상상력은 마음껏 활공(滑空)한다.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이 되는 황홀한 합일.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제,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우주에서 가장 정교한 레이더도 죽음을 탐지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최첨단 스텔스기처럼 다가온다. 그러므로 정말 미치도록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절대 지체하지 말라고, '코코'는 이야기한다. 가수의 꿈을 가진 주인공 미구엘이 맨 처음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곳이 이승이 아니라 저승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코코'에서 저승으로 간 미구엘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OST 'Remember Me(기억해줘)'는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에게 잊히는 순간이야말로 정말 죽는 때라는 메시지를 상기시킨다. 너무나도 따뜻한 선율의 곡이지만 심연처럼 애달프다. 그러니 부디 네가 나를, 내가 너를 기억해주길.
픽사는 거의 항상 뒤통수를 친다, 강하게.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다루지 못하리라 여겨지는 소재를 채택해 정말 재밌고 감동적인 데다가 삶의 의미까지 반추하게 만드는 영화를 내놓는다. '님아, 그 강은 건너도 되오'라고 말하며 죽음을 따뜻하게 껴안는 '코코'도 왜 픽사인지, 픽사여야만 하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덧글)
졸필을 늘 애독해주는 고마운 독자, 심** 군이 '코코'에 대해 이런 의문을 던졌다.
"저는 왜 이렇게 '가족'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지 넘나 궁금하더라구요"
필자의 억측은 이렇다. 픽사가 걸작 애니메이션을 지속적으로 내놓으려면 뛰어난 제작력은 물론이고 막강한 자금력이 필수다. 픽사의 작품은 북미에서 2억 달러 이상의 성적을 넘지 못하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잘 듣지 못한다. 그만큼 기대치가 높다. 개봉 시기는 대부분의 상업영화 흥행에 절대적인 변수다. 최근 폭스까지 인수한 미디어 공룡, 디즈니는 미국에서 '코코'를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에 개봉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 최대 명절 중 하나다.
무릇 명절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가족이 미운 사람일지라도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만큼은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고기를 뜯으며 가족의 의미를, 잠깐이라도, 곱씹기 마련이다. 명절 음식을 싹쓸이한 후 가족 단위로 관람하기에 '코코'만 한 영화도 없다고 디즈니는 생각했을 것이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인 미국 추수감사절이 지나가면 미국인들은 또 다른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New Year's Day)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다. 11월 말부터 새해가 올 때까지 미국은 '가족 주간'이 계속되는 셈이다. 이렇게 '코코'는 북미 시장에서 장기 흥행을 노린 작품임에 틀림없다.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이야기의 뿌리를 캐내 훌륭하게 변주하는 디즈니와 픽사의 저력을 상기해 볼 필요도 있겠다. '겨울왕국'이 북유럽 신화와 설화를 바탕으로 박스오피스를 점령했다면, '코코'는 멕시코의 전통 명절을 차용했다. 아직도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왜 멕시코의 명절을 애니메이션 소재로 선택했을까? 히스패닉은 흑인을 제치고 미국 내에서 제2의 인구집단이 됐다. 미국 히스패닉의 다수는 멕시코계다. 히스패닉의 영향력은 이미 커져 있고,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이처럼 정교한 상업적 고려가 '코코'의 주제와 소재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픽사 애니메이션의 이면에는 너무나 치밀한 시장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모든 상업영화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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