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는 ‘인천의 태반’이라 불린다. 혹자는 이곳을 노쇠한 책방 거리로 알고, 혹자는 유명세에 비해 볼 것 없는 동네로 기억한다. 그러나 배다리는 인천에서 아주 중요한 동네다. 인천이 개항하자 이곳에서부터 근대 문화가 태동했다. 배다리라는 지명은 행정적인 지명이 아니다. 그래서 배다리의 공간적 범위를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못 박아 말하기는 어렵고, 현재 지명을 놓고 말한다면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에 있는 동구 금곡동, 창영동, 송림동 일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배다리는 ‘배가 닿은 곳’이라는 뜻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개항장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인천항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이 배다리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터전을 빼앗긴 설움에 가난의 고통까지 더해졌지만 조선인들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배다리에서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렸다. 마을이 생기자 밀물 때면 긴 갯고랑을 타고 작은 배들이 들어왔고, 그 배가 싣고 온 해산물과 인근 농산물로 말미암아 주변에는 큰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장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사람들은 다시 시장을 키웠다. 뒤이어 학교와 공장이 들어섰다.
1892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립 초등교육기관 ‘영화학당’, 1897년에는 한국 최초로 철도 공사가 시작된 ‘우각역’, 1907년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이자 훗날 인천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창영초등학교’, 1917년에는 국내 최초의 성냥 공장 ‘조선인촌’, 1920년대에는 인천 최초의 막걸리 양조장 ‘인천양조장’, 그리고 1960년~1970년에는 인천 시민에게 인기 최고였던 아이스케키 공장 ‘창영당’, 중앙시장 한복거리, 그릇시장, 양키시장 같은 명물이 헌책방과 함께 배다리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향을 잃은 피란민이, 19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흘러든 노동자들이 이곳 배다리에서 옹골진 삶을 이어 나갔다.
개항기 인천의 문화유산과 서민의 고단한 삶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배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인천시가 낙후된 구도심 여러 지역에서 전면 철거 방식의 도시재생사업을 전개하면서다. 송도경제자유구역과 청라경제자유구역을 남북으로 연결하기 위한 정책의 산물인 관통 도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마을의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배다리 사람들의 삶마저도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나둘 배다리를 떠나자 거리에 남은 건 빈 가게뿐이요,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한때는 40여 개에 이르렀던 헌책방도 ‘아벨서점’, ‘나비날다’ 등 겨우 대여섯 곳만 살아남아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운영비용도 나오지 않는 환경에서도 마을을 이어가기 위해 고집스러운 삶을 지속한다.
다행히도 이를 두고 볼 인천인이 아니다. 2007년부터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멈춰버린 시계추처럼 한동안 정지되어 있던 마을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개발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를 보듬기 시작한 것. 지역시민운동가, 문화예술인, 성직자 그리고 지역민들이 하나가 되어 산업도로 건설을 반대하며 극렬히 저항했다.
이제 배다리는 외롭지 않다. 지역민들은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에, 배다리를 사랑하는 문화 예술인들은 거주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까지 배다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신비한 미로, 배다리생활사전시관
사전 정보 없이 배다리마을 입구에 서면 ‘설마 이게 다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여기에 왜 왔나 싶은 사람도 있을 거다. 과거 영화롭던 거리는 이제 서점 몇 곳, 문구점 몇 곳이 전부다. 그러나 배다리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곳도 드물다. 진짜 여행은 곳곳에 들어가 이곳 사람들과 대화하며 배다리를 자세히 알아가는 데 있다. 배다리에 도착한 자, 당장 ‘나비날다’ 서점으로 들어갈 것. 배다리의 대표 서점인 나비 날다의 주인은 서점이 위치한 건물의 특성을 살려 안내소와 생활사전 시관을 조성했다(이 건물은 배다리에 사람들이 가득하던 60년대에 동네 랜드마크였던 ‘조흥상회’로, 6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독특한 곳이다).
우선 안내소에 들어서면 배다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화활동을 확인할 수 있고, 무인 시스템이지만 운 좋게 누군가를 만나면 이 동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핵심은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 만나는 2층 생활사전시관. 조흥상회 건물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책방 주인은 전시관으로 꾸미자는 계획을 세웠다고. 옛 주인이 빠져 나간 자리에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골동품들이 가득하다. 7국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찍힌 옷걸이, 인천백화점에서 사은품으로 나눠준 컵, 누군가의 흑백사진, 아이스케키 통 등 보물 같은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사가 그 미로 같은 공간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실내에서는 영화상영과 뜨게강의 등 재미 있는 일들도 소소하게 벌어지는데, 이 공간에서라면 그 무엇도 특별해진다.
글 최희영(<삼치거리 사람들> 저자), 김선미| 사진 김연지,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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