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in essay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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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빼고 다 좋아합니다."

대학 지역균형선발 인성면접 때 교수님께선 내게 공부 말고 뭘 잘하냐고 물어보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공부를 좋아해서 한 건 아니고 설상가상 그걸 가장 잘 한다고 보긴 어려웠으므로 내가 나름 즐겁게 하는 랩이나 춤을 언급했던 거 같다. 세 분의 교수님은 쿡쿡 웃으셨다.

"평소 공부는 얼마나 했나요?"
"자율학습을 6시부터 해서 12시까지 합니다."
물론 개뻥이다.
"그럼 몇 시에 일어나죠?"
"새벽 6시요."

개뻥 추가. 그러나 나는 매우 당당했다. 고3. 같은 반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급식판 바닥까지 핥으며 매끼 폭식도 하고 몰래 자습을 빠지거나 단체로 노래방 땡땡이를 쳤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을 무렵 친구들은 내 자습실 자리에 과자를 한 뭉텅이 사다놓고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소주병에 요플레를 가득 담아 책상 가득 올려놨다. (소주병을 어디서 났는 진 알 길이 없다.) 여름방학에도 늘 학교를 갔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고 놀려고 자습을 하러가야 했다. 나는 면접 중인 것도 잠시 잊은 채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한 교수님의 혼잣말이 완전 산통을 깼다.

"5시간? 잘 만큼 잤네, 뭐."

이건 뭐, 비아냥인지 객관적 진단인지 판단이 안 섰다. 다 같이 고생하며 공부하고 때론 나는 망했다며 울어버렸던 지난 여름이 떠올랐다. 교수님의 한 마디로 그것이 폄하되거나 정리될 수 없음은 명백해보였다. 나는 오기가 생겨 교수님께 굳이 대답을 했다.

"네. 저희 엄마가 건강이 최고라고 했거든요."

세 명의 면접관은 그저 허탈하게 웃었고 그 답답한 공간에서 진정 웃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름 비밀병기를 꺼낸 줄 알고 나의 서툰 충동을 자랑스레 내밀며 거대한 산봉우리를 깎겠노라 선언한 셈. 나는 매우 깔끔해진 마음으로 고등학교로 돌아왔다. 담임선생님께 등짝을 두들겨 맞았다. 너 망했다, 너 떨어졌다는 말을 유비 귀가 되도록 들어야했다.

그리고 이제 묻는다. 면접 보셨던 교수님들, 그 때 왜 저를 뽑으신 건가요? 역시나 저는 공부엔 잼병이고 관심도 없는, 일관성 끝내주는 아이입니다. 학교에 들어와서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고 일부러 수업 빠지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여전히 공부 뺀 대부분의 일을 재미지게 하고 있습니다. 설령 학점은 멍멍이똥 같아도 오기가 생겨서라도 더욱 무심해지려는 쫀심도 그대롭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졸업을 앞둔 고학번이 된 지금 그 때 교수님들의 결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왜 저를 뽑으신 겁니까? 교수 앞에서도 별 신경도 안 쓰는 깡따구 때문인지,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별로 굴하지 않는 오기때문인지, 아니면 아직까지도 제가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 때문인지 진정 궁금해졌습니다. 졸업은 아득하고 갈 길은 먼데 왜 저를 이 학교에 들어오도록 허락해주신 겁니까? 제 좁은 식견으론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졸업을 앞둔 상황이다 보니 '나는 뭐 하는 놈인가'하는 고민에 빠져서 더욱 어떤 정답을 얻고 싶었나봅니다. 교수님께서도 엄청나게 뾰족한 수가 있어서 저를 뽑으신 게 아닐 수도 있으니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 그에 합당한 자리값을, 제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엔 타인에게 칭찬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으로 남고 싶단 외로움도 작용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칭찬받고 내편 만들고 싶어 하는 건 저의 본능이라고 인정했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다짐에는 오히려 제 이름이 이 자리까지 오도록 거쳐 온 수많은 다른 이름, 다른 노력들을 생각해서라도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미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낳았다는 사실 외엔 굳이 잘 해줘야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선 저를 먹이고 키우셨습니다. 때론 지랄견 같이 망나니 황소고집만 부리던 저를 견디고 함께 살아준 가족이 있고 제 편을 들어주며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보다 제 미래를 걱정해주신 스승님이 계셨고 무엇보다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해 나름의 짐을 지고 온 '과거의 제 자신'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제 모습은 과거의 모든 존재자들의 기억과 에너지가 얽혀 형성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받은 힘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지금 제 자리에서 '된 놈'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고 제 자신이, 가족이, 친구가, 스승이 마치 자기 일처럼 뿌듯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정말 기적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가진 것도 없고 뭐가 되리라는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최소한 제가 마음에 품은 이 감사함을 믿고 나아가고 싶습니다. 인격이 부처인 것도 아니고 능력이 슈퍼맨인 것도 아니지만 제 마음에 저만의 답이 있고 그걸 긍정해준 사람들이 있기에 저는 그것만으로도 자족하고 고마워하며 '잘'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교수님들께선 그런 저를 저보다 먼저 알아보신 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자기 부족한 줄은 알고 고마워할 줄 아는 애, 적당히 자신감도 있고 열등감도 있는 애. 말은 안 듣겠지만 지 맘 속에서 아우성치는 메아리가 울리는 애.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여서 그 분들께서 저를 이다지도 과분한 학교에 들여 주신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퍽 감사할 일이네요.
비록 저는 여전히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살겠지만 그들의 마음을, 저를 꿰뚫어본 어떤 통찰을 믿고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나름대로 내 맛에, 내 멋에 살면서 그것이 내 노력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어떤 가능성으로서 당신의 자리까지 왔을 겁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소한 당신이 꽤 멋진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움츠러들지 마세요. 당신,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저도 이렇게 나름의 길을 살아가는 걸 보면 당신도 당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당근 모르죠.
하지만 믿는 겁니다. 우린 쌩판 모르는 남이지만 저는 당신을 믿는 겁니다. 지금 너무 재미없게 살지라도 당신 꽤, 멋진 사람입니다. 그 사실만 잊지 마세요. 제가 이 자리에 있고 재밌는 인생 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첫째는 그걸 가능하게 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내 인생이 귀해진 만큼 당신 삶도 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깨 펴고 행복하게, 재밌게 살아봅시다. 감사하면서 당당하게 살다보면 혹시 모르죠. 세 번째 깨달음을 얻을지도. 우리 안에 숨겨져 있어 몰랐지만 기필코 제 손으로 찾고야 말, 우리 안의 정답 말입니다. 바로 '내일 할 내 일'.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먼저 찾을 겁니다! 누가 먼저 찾을지 내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찾든, 당신이 먼저 찾든 저는 둘 다 좋습니다. 경쟁, 아이고 의미 없다. 세 번째 깨달음은 그냥 다 같이 고민하고 찾아봅시다. 당신은 찾게 될 겁니다. 항상 불확실해서 불안해지곤 하지만 그런 당신을 위해 제가 장담합니다! 당신이란 사람.

꽤 멋진 사람입니다.
이제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성장할 일, 뜨거운 침묵을 깨고 살아 숨 쉬는 병아리가 될 일만 남았습니다. 오늘 하루, 파이팅 입니다! 힘이 안 난다면 오늘은 쉬세요. 제가 장담하건데 당신,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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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예전에 썼던 글! 일단 1-2년 전에 끄적인 걸 여기에 차곡차곡 모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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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힘들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지만 너무 힘들다고 놓아버리지도 않기! 힘들 때마다 다시 새기는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