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열광하다steemCreated with Sketch.

in gravity •  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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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하다

환각상태는 오래 전 민속학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다. 이 대변동은 1960년대 말에 상위문화에서 하위문화에 걸쳐 세계를 뒤집어 놓았었다.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 그 곳에 이르게 된 걸까? 먼저 이 단어가 록 음악으로 되돌아 오고 시대가 매우 필요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선 현추세는 베르너 헤어조그, 세르지오 레오네, 토브 후퍼를 중심으로 “ 싸이키델릭(환각의) ” (꽃도 아니고, LSD도 아닌) 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면서 다시 결집하는 중이고 그럼에도 환각상태로써 횡단되고, 감전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는 이야기를 모르는 어떤 것의 근본으로 향한 여행으로 본다. 열기가 있고 환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두번째 상태 속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영화들이 본질에 의해서 사이키텔릭 영화로 구분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지만 어떻게 해서 환각상태가 하나의 파도처럼 이 영화에서 저 영화로 통과하는지, 어떻게 신호를 만들며 또 다른 의식의 상태로 보내어지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환각 상태는 하나의 형식적 왜곡과 인식의 왜곡을 전제로 한다. 환각 상태는 환각을 잡으려는 미친 내기를 하는데 – 그것은 종종 그리 길게 붙잡아 두지 않는 이유가 된다 - 삼라만상의 중요한 힘을 불러 들이면서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마치 재생된 것 같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를 위해서 까이에를 만든다. 사이키델리즘이 1960년대에 태어나는 것을 목격하는 문화적 범위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빈티지한 향수 속으로 떨어지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와 행위에 대한 사례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을 가진 미학과 정치학 사이의 강한 연결 사례다. 사이키델릭한 생각은 자유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위대한 도약을 위해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지는 않는다. 이 두 대척지에 있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인상적일 수 밖에 없는데 특히 열광적인 팬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2001년의 서사적이고, 공상적이며, 철학적인 풍부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테크닉에 대한 배타적인 강박증(그렇지만 <인터스텔라>를 기다린다)으로써 매일 그들의 사이키델릭한 꿈을 가슴 속에 감추고 있는 열성팬들에게 어필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달 개봉하는 미아 한센 러브의 <에덴>은 1990년대 세대를 위한 위대한 프랑스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광란적인 춤과 프렌치 터치에 대한 두 시간 십 분은 그 정신적인 제목이 약속하는 바를 붙잡지 못하는데 결코 우리는 좋아했을 만한 음악 안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지는 않는다. 환각주의는 영화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태,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신체적인 상태들이 되게 만든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사이키델리즘은 그러므로 관객들이 눈으로 보고 최면에 걸리게 만들며 적절한 빈도에 부응하도록 만드는 방법과 어떤 전이된 상태가 되도록 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환각적인 감정없이 환각주의는 있을 수 없고 자신을 놓아 버리지 않고서는 그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향한) 이야기, (변형된) 형식들, (영화의 현실적인 대상: 여행하는 자는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인) 관객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최근의 시대로부터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정치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성적으로든지간에) 정복의 시대와 결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다. 사이키델리즘은 하나의 장르라기보다 정신이며 우리를 오늘날 다시 사로잡을 수 있는 정신이라 하겠다. 사이키델리즘은 "스타일"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해하기 위해 이 분 삼십 초 동안 삐에르 헨리와 미쉘 콜롬비에의 '피쉐 록(Psyche Rock, 1967)'을 들어 보라. 즉각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즉시 여행을 재개하는 것이다. 거기엔 모든 것( 우리는 바로 그 순간을 살 수 있을 것이다)이 모두 존재한다. 해소되지 않는 환희의 근원, 그러나 역시 유머, 환희, 두려움, 엑스타시 같은 한계에 도달하는 왜곡이 있다. 결국 사이키델리즘은 18세기 말에 탄생한 승리를 거둔 주관성의 커다란 강물 속에 있다. 사이키델리즘은 로맨틱한 모험이다. 그것이 최근의 사이키델리즘의 위대한 모험인 것이다. 상징주의, 그에 이은 초현실주의, 그리고 환각주의의 외관을 취하면서 우리의 꿈을 이식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크고도 로맨틱한 강물이다.

까이에 뒤 시네마 2014.11 7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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