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푸른 밤'의 주된 정서는 낭만일 것이다. 가수 최성원이 발표한 이래 많은 가수들이 커버한 <제주도의 푸른 밤>은 포근한 가사와 멜로디로 시대를 뛰어넘는 클래식이 되었다. 밤하늘의 짙은 어둠을 가르며 제각기 빛나는 별 사이사이마다 푸름은 서려 있기 마련이어서 최성원은 그렇게 노래했을 것이다. 푸른 암흑이 연착륙해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흐릿해진 바닷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지지 않기란 난망한 일이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라라랜드>는 푸른 밤의 낭만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파티장에서 나와 LA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가 'A Lovely Night'을 배경으로 선보이는 경쾌한 댄스는 푸른 밤과 완벽하게 조응한다. 또한 밤의 천문대에서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세바스찬과 미아의 환상적인 춤은 말 그대로 환상이 되었다.
영화 <히트>는 <라라랜드>처럼 미국 LA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히트>에서 LA의 밤은 낭만을 몰아내고 고독과 우수(憂愁)를 초대했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LA는 꿈과 희망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본디 미국 서부 개척과 이민의 역사가 응축된 지역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민자와 부랑자와 노마드의 도시, LA.
영화 <히트> 속 주인공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다. 두 번의 이혼 후 세 번째 결혼마저 위태로운 형사 빈센트 한나(알 파치노)와 가족 없이 자신의 팀원들을 극진히 보살피는 프로 중의 프로 범죄자 닐 맥컬리(로버트 드니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너무나 깊은 고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아버지의 행방도 모르는 닐의 집은 바다 코앞에 위치해 있다. 닐(로버트 드니로)의 집에는 가구가 없다. '프로 범죄자가 되려면 30초 안에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지키는 닐에게 가구는 물론이고 사랑과 가족도 초고가의 사치품일 뿐이다. 닐은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 라이프'의 선구자일지도 모르겠다. 사냥개처럼 지독하게 범죄자를 쫓는 일에 몰두하는 빈센트(알 파치노)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 혹은 '워라밸'은 공허한 구호다. 두 사람은 대다수의 평범한 삶을 거부한다. 애초에 정주(定住)는 그들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
가족, 연인, 친구가 우리 곁을 지킨다 하더라도 끝내 우리를 잠식하는 절대 고독을 두 사람은 남보다 수백 배 더 깊이 새기고 있다. 이 영화의 정조를 지배하는 푸르스름함은 혈액 순환이 멈춘 망자의 육신을 떠올리게 하며 관객을 고독한 죽음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지금, 이 곳'에서 도망친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그것은 문득 길바닥을 내려다보면 부상하는 나의 그림자와 같다. 삶의 빛이 나를 비추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장르를 초월한 아메리칸 클래식"이라고 극찬한 이 명품 범죄액션영화에 고독의 정서가 없었다면 이토록 커다란 감흥과 여운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히트>는 '범죄액션영화'라는 장르적 완성도 역시 빼어나다. 액션 연출에 군더더기가 없고 추격전의 긴박함은 선연하며 주조연 캐릭터는 모두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한다. 공항 활주로에서 이뤄지는 닐(로버트 드니로)과 빈센트(알 파치노)의 마지막 추격 씬은 지형지물과 조명을 영리하게 활용한 촬영, 미장센, 편집으로 넋을 빼놓는다. 닐(로버트 드니로) 일당과 빈센트(알 파치노)가 이끄는 경찰들이 펼치는 LA 도심 총격전은 미국 어느 해병대 부대의 영상 교재로 활용됐을 만큼 리얼리티와 만듦새가 일품이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다크 나이트> 제작 당시 <히트>의 은행털이 씬을 참고했다고 했을 정도이니 <히트>의 액션 시퀀스는 범죄액션 영화의 교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온갖 범죄가 복마전처럼 도사리고 있는 대도시 LA의 음울한 분위기 묘사도 <히트>가 <다크 나이트>에 끼친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역대 최고의 영화 순위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대부> 시리즈를 빛낸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는 <히트> 전에도 이미 범죄영화의 전설이었다. 동일한 장르의 영화에 반복 출연하는 배우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를 보여주며 실망을 낳기 쉽지만 두 배우는 기시감을 훌륭히 걷어낸다. 두 사람의 연기력도 훌륭하지만 닐(로버트 드니로)과 빈센트(알 파치노)라는 또렷한 캐릭터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 캐릭터는 범죄자와 형사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지만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측은해한다. 늘 슈트를 입고 현장에 나가는 두 사람의 차이점은 닐은 노타이 차림이고, 빈센트는 항상 넥타이를 맨다는 것. 고작 넥타이 하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만큼 근원적으로는 동질한 두 캐릭터를 바탕으로 뛰어난 앙상블을 보여준 두 명배우에게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수놓은 LA의 고독한 푸른 밤의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마지막 악수는 서글프고 또 서글퍼서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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