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왜 통일대통령 빌리(빌리 브란트, Willy Brandt)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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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와 독일 통일

통일의지를 일구어 낸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69~1974년 총리 재임, 1964~1987년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 1971년 노벨평화상 수상)는 동방정책으로 독일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확산시키는 한편,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동·서독 기본조약(1972년) 체결, 양독 간의 동질성 회복을 촉진시켰다.

또한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1970년)을 체결하는 한편 1970년 12월 7일에는 나치가 40만을 학살한 폴란드의 국립묘지를 찾아가 무릎을 끓고 눈물로써 사죄한바, 이로 인하여 독일인을 대하는 유럽인의 경계심과 적개심이 풀리기 시작하였고, 독일국민도 이때부터 진정으로 화해하고 협력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브란트는 1973년 이스라엘을 방문,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만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하였는데, 빌리의 행동은 독일 국민이 총리를 믿고, 정략적인 정치행위를 경계하며 일관성 있게 통일정책을 지원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빌리의 탄생 과정

서독은 패전 후 첫 총리인 아데나워정권에서 기민·기사 동맹과 사민당 간의 대 연립을 추진하였고, 서독국민 간/동·서독국민 간의 화해를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브란트 시절에는 사민당과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가 수립되어 대다수 서독 국민이 지지하는 동방정책을 확립하여 실천하였고, 야당도 통일정책에 관해서는 양보하는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결속은 독일통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브란트의 연립정부에서 시작, 사민당 출신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1974~1982년), 기민당 출신의 헬무트 콜 총리(1982~1998년)까지 이어져,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달성하였다.

우리가 독일로부터 배워야 할 것

(국민화합의 필요성) 통일을 위해 이념적 대립/전쟁으로 인하여 깊은 상처를 받은 피해자들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분단 이후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여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실정인바 정치력이 있고 진정으로 화해하고자 하는 지도자와 국민의 변화가 절실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많은 국민을 헤아려 상처를 치료하고 난 후, 통일정책을 내세운다면 매 정부마다 다른 통일정책은 불필요하다.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우리가 주도하여 한반도에서 북한의 독재정부를 몰아내고 주권이 미치도록 하여 하나의 국가체제로 만드는 단순한 개념임을 주지함이 요구된다.

(민족상잔의 상처 해소 중요) 민족상잔 중 가장 큰 것이 6.25전쟁인바, 대한민국 군의 피해는 총 98만 7천여 명(전사 14만 7천 명, 부상 70만 9천명, 실종 13만 1천여 명)이다. 민간인 피해는 84만 명으로, 피학살자 12만 3,936명, 사망자 24만 4,663명, 부상자 22만 9,625명, 피납자 8만 4,532명, 행불 33만 312명, 북한군으로의 강제징집자 40만여 명, 경찰관 사망자 1만 6,816명 등 모두 1백 40여만 명(북한군으로 피납된 인원과 경찰 피해 제외)이며, 우리의 총 피해는 182만여 명이다.

한편, 북한군의 피해는 52만 명 사망, 40만 6천여 명 부상, 민간인 손실은 2백만여 명으로 총 피해는 2백 92만 명이며, 유엔군 15만 명(이중 14만 명이 미군), 중공군 90만 명의 인명 손실이 발생하였다. 남북한을 합한 우리 민족의 인적 손실은 5백 20만 명이며, 당시 남북한 총 인구가 3천만 명이므로 인구 당 6명 중 1명이 사망한 셈이다.

방대한 규모의 이산가족도 발생하였는데, 북한 피납 30만 명, 피난민 3백만 명 등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6.25전쟁 시에 남한에서만 12만 3,936명의 피학살자가 발생하였고, 북한지역에서도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남북한 상호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같은 학살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9월 중순까지 경상도 지역 일부와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하면서 시작, 우리 군과 유엔군이 1950년 9월 중순부터 1950년 10월 하순까지 한·중 국경까지 접근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1950년 10월 하순부터 1951년 4월 초에는 중공군이 개입, 서울이 함락되고, 1951년 4월 초순부터 1951년 6월 중순까지는 다시 우리 군과 유엔군이 주도권을 잡아 북상하는 등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과정에서 보복 살상이 자행되었다.

보도연맹원 사건도 우리 역사의 오점인바, 보도연맹원은 우리 정부에 의하여 1949년 10월 좌익인사의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인데, 가입자가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군과 경찰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 및 즉각 처분을 단행, 상당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인민군 점령 시 보복 학살이 이어지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남북한은 분단상태로 80여 년이 경과되었는데, 연좌제로 인한 상처도 건들지 못한 상태다. 1980년 9월 1일자로 연좌제가 폐지되었지만, 직계 친족, 배우자의 인족 및 친지 등이 과거 부역자, 월북자, 피납자, 혹은 좌익경력자일 경우 국민의 공직 진출과 해외여행까지도 제한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결 론

우리는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 지 간과하고 있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냉전기에서 탈냉전기로 이어오기까지 주변국과 북한을 상대로 한 통일정책과 정권 획득에 치중한 나머지 국민을 정치적으로 단합시키는 데는 소홀하였다.

분단 이후 매 정부마다 다른 명칭, 다른 내용의 통일정책을 표방하고 있고, 어느 정부도 前 정부의 대북정책의 장점과 성과를 진심으로 계승하지 않아 북한의 대남 무력적화통일을 약화/포기시키는 변화를 도출하지 못해, 북한이 우리를 조종하려고 위협하고, 주변국의 동참도 어려운 상태다.

우리 국민은 분단 이후 다양한 국가안보위기 상황, IMF 경제위기, 2002년 한일 월드컵 등 필요할 때는 하나로 뭉치는 잠재력이 있지만, 아직까지 브란트 같은 지도자가 부재한 것은 지도자들의 부덕과 국민들 간의 불화에 기인한다.

우리는 그동안 민족상잔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소홀한바, 이러한 치유의 방치는 여야로, 지역으로, 이념으로 갈려 국론 분열과 나아가 통일동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향후 국민들 간의 상처치유에 적극성을 가져야 하는바, 빌리 브란트의 진정성 있는 사죄가 유럽 국가/국민, 독일국민의 죄의식/침략역사를 청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교훈을 상기, 대내외 통일동력을 강화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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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이런 분이 계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