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퍼페추얼 캘린더, 투르비용이 전통적인 컴플리케이션의 정의에서 제외되려는 위기(?)감이 들고 있습니다. 퍼페추얼 캘린더의 경우 일부 메커니즘을 생략해 단순화 한 설계와 CAD 기술의 발달 덕분입니다. 과거 퍼페추얼 캘린더는 이것을 전담하는 장인이 도제 식으로 설계를 계승하는 방법이 전통적이었으나 이제는 CAD와 참고 할 수 있는 시계가 있다면 메커니즘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이렇게 완성했다고 해도 같은 수준의 시계라고 부를 수 없지만, 컴플리케이션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움직임입니다. 투르비용 역시 메커니즘의 핵심인 케이지 가공과 조립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인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며 2000년 중반에 이어 다시 한번 대중화 시도가 모색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컴플리케이션의 포지션을 지키고 있는 메커니즘이 미닛 리피터(모듈형 제외)와 스플릿 세컨드입니다. 후자의 경우 ETA의 칼리버 7760과 7770 의해 대중화가 시도되었으나, ETA의 에보슈 공급 중단과 맞물려 시장에서 잘 볼 수 없게 된 상황입니다. 스플릿 세컨드는 기본적으로 수동 혹은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보유해야 하는 것이 선결조건입니다. 크로노그래프라는 베이스가 있어야 스플릿 세컨드로 쌓아 올릴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을 충족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인 하우스 무브먼트의 시대라고 해도 자체적인 크로노그래프를 보유한 브랜드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컨셉트 랩타이머(Laptimer)는 F1의 살아있는 전설 미하엘 슈마허가 홍보대사를 역임했던 2010년 그의 요청에 따라 시작됩니다. F1의 엄청난 스피드처럼 기계식 시계로도 즉각적이며 연속적인 계측이 가능한 시계가 목표로 정해졌는데요. 아시다시피 현재의 기계식 시계로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랩 수는 최대 두 개로 스플릿 세컨드가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재빠른 연속 계측에는 스플릿 세컨드로도 무리가 따릅니다.
약 5년에 걸친 개발 끝에 완성한 로열 오크 컨셉트 랩타이머는 스플릿 세컨드를 기반으로 강렬한 외관과 더불어 강력한 기능을 들고 나왔습니다. 바로 슈마허가 요구했던 연속적인 계측을 실현한 것이죠. 스플릿 세컨드는 아름답고 빼어난 메커니즘이지만 몇몇 맹점이 있습니다. 두 개의 랩(Lap) 타임이 60초 이상 벌어지기 시작하면 실직적인 계측이 불가능해집니다. 두 개의 랩 타임 중 앞선 랩 타임만 카운터에 적용될 뿐, 뒤쳐진 랩 타임은 카운터에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두 개의 크로노그래프 바늘과 달리 카운터 바늘은 하나이기 때문이죠. 이를 극복해 완전한 메커니즘으로 발전한 시계가 랑에 운트 죄네의 더블 스플릿입니다. 두 개의 카운터 바늘을 갖춰 제대로 된 계측이 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스플릿 세컨드에 플라이백 메커니즘을 적용했을 때로 플라이백의 빠른 재스타트도 일정 부분 제한됩니다. 재스타트를 하려면 두 개의 크로노그래프 바늘을 먼저 하나로 합쳐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로열 오크 컨셉트 랩타이머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 들었습니다.
푸시 버튼은 스플릿 세컨드와 마찬가지로 총 세 개의 버튼입니다. 케이스 오른쪽 2시와 4시 방향의 버튼은 보통의 스플릿 세컨드처럼 스타트, 스톱과 리셋을 담당합니다. 케이스 9시 방향의 버튼이 로열 오크 컨셉트 랩타이머의 핵심으로 랩타이머 푸시피스라고 부릅니다. 보통의 스플릿 세컨드라면 함께 움직이던 크로노그래프 핸드 둘을 나눠놓는 스플릿 버튼이나, 여기에서는 보통의 플라이백처럼 9시 방향 버튼을 누르면 연속적인 계측이 가능합니다. 즉 스타트 이후 랩타이머 푸시피스를 누르면 크로노그래프 핸드 하나는 멈추고 다른 하나는 계속 전진하며, 다시 한번 같은 버튼을 누르면 전진하던 크로노그래프 핸드가 멈추며 멈춰있던 다른 크로노그래프 핸드가 리셋과 동시에 다시 스타트를 하게 됩니다. 즉 번갈아 가며 빠른 재스타트를 할 수 있게 되어, 연속 계측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이 기능을 통해 플라이백 스플릿 세컨드의 맹점을 개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강력한 기능은 수동의 칼리버 2923이 구현합니다. 어두운 빛깔을 띄는 칼리버 2923은 현대적이며 강렬한 분위기를 드러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스플릿 세컨드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두 개의 컬럼 휠과 중앙의 클램프는 스플릿 세컨드에서 볼 수 있는 부품들로 직선적인 레버 디자인과 코팅을 통해 현대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낸 것이죠. 오데마 피게는 선두에 있는 하이엔드 중 가장 스포츠 성향이며 또 그에 어울리는 외관과 소재를 사용하지만, 무브먼트 자체는 매우 전통적입니다. 칼리버 2923는 분위기가 현대적일 뿐 전통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셈입니다. 칼리버 2923은 스플릿 세컨드 메커니즘에 가려 보이지 않는 파워트레인이 80시간의 구동을 보장합니다. 수동 크로노그래프로는 제법 긴 구동시간이며 두께는 2층으로 쌓아 올린 메커니즘에 의해 12.7mm로 다소 두꺼우나 로열 오크 컨셉트 시리즈의 케이스는 충분히 무브먼트 두께를 수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50m 방수가 가능하도록 스크류 다운 방식의 크라운이며 이것을 풀면 크라운은 뉴트럴 포지션이 됩니다. 바로 와인딩 포지션이 되는 여느 시계와 다르죠. 로열 오크 컨셉트 시리즈의 전통(?)이라면 전통인 부분입니다. 여기서 한 칸 당겨야 와인딩 포지션에 들어가며 한 칸 더 당기면 시간 조정입니다. 와인딩 시의 감촉이나 조작감은 크게 도드라지는 부분 없이 무난하며 매끄러우나, 크로노그래프의 푸시 버튼은 칼리버 2892의 포스 넘치는 외관과 달리 경쾌해 인상적입니다.
케이스는 포지드 카본, 케이스 백은 시스루 백 사양의 티타늄 소재입니다. 베젤 역시 같은 소재이며 케이스 양 측면에서도 같은 소재를 사용한 듯 합니다. 티타늄을 사용한 부분은 금속 소재의 특성을 살려 헤어라인, 매트 피니시 같은 다양한 표면 가공을 더했고, 포지드 카본 특유의 패턴과 어우러집니다. 또 블랙 세라믹 소재의 푸시 버튼과 크라운 일부에는 핑크 골드를 사용해 포인트가 됩니다. 랩타임 푸시 피스에는 미하엘 슈마허의 이니셜인 MS를 새기고, 그 위쪽의 케이스에는 그가 기록한 7회의 종합우승을 기리는 7개의 별이 새겨 의미를 더합니다. 다이얼과 케이스는 컨셉트 라인답게 아방가르드 합니다. 로열 오크 디자인을 기반으로 진화한 컨셉트 라인의 다이얼은 골조의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무브먼트의 일부를 드러냅니다. 다이얼이라고 칭하기는 어려우나 골조 구조의 오른쪽에는 30분 카운터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대칭하는 위치에 영구초침이 있으나 모양이 독특할 뿐, 크게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아마 계측 기능에 집중하기 위함이지 싶군요.
케이스 두께와 비례해 제법 두꺼운 러버 밴드와 매칭합니다. 티타늄 소재의 폴딩 버클을 사용하며, 버클의 디자인 또한 컨셉트 라인에 어울립니다. 푸시 버튼이 있는 케이스 오른쪽뿐만 아니라 케이스 왼쪽에도 살을 더해 볼륨 있는 케이스가 더욱 큰 볼륨 감을 드러냅니다만, 포지드 카본을 비롯, 티타늄 같은 경량 소재를 많이 사용해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무게에 비해 체감하는 실제의 무게는 크지 않습니다. 로열 오크 특유의 러그 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면 착용감에서는 큰 무리가 없을 듯 하군요.
스플릿 세컨드라는 컴플리케이션을 한 단계 진화시킨 로열 오크 컨셉트 랩타이머는 날카로운 컨셉트를 현실화 시킨 컨셉트 라인업에 포함될 자격을 지닌 시계입니다. 이 모델의 방향성을 제시한 미하엘 슈마허가 없었다면 아마 탄생하지 못했을 시계가 아닌가도 싶은데요. 때문에 스키 사고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미하엘 슈마허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의 기적적인 부활을 기원하며 리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