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Calendarium
In 1435, Sicut Dudum, forbidding the enslavement of the Guanche natives in Canary islands by the Spanish, is promulgated by Pope Eugene IV.
1435년 스페인군이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Sicut Dudum” – 라틴어로 “오래전에” – 라는 칙서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반포하다.
우리가 노예 해방 그러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에우제니오 4세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때가 유럽의 신대륙 약탈이 본격화되기 60여년 전의 일입니다. 이 시기에 노예제도에 대한 규탄을 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칙령이 되는 것입니다. 다사다난했던 에우제니오 4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1. 교황이 되기 전
에우제니오 4세의 속세의 이름은 가브리엘레 콘둘메르 입니다. 콘둘케르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24세가 되었을 때 외삼촌인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에 의해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됩니다. 당연히 24세밖에 안된 주교를 받아들이진 않았겠죠. 그래서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교황청 회계 담당, 교황청 서기장, 산 클레멘테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즉 교황청 내의 일을 많이 해 왔던거죠.
2. 교황선출
콘둘메르는 1431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에우제니오 4세의 이름을 받습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피지컬을 가졌지만 분쟁을 잘 해결하지 못하고 융통성이 부족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적으로 한 일은 전임 마르티노 5세의 가문으로서 많은 성과 영지를 하사받은 콜론나 가문을 경계하여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점점 심각해 졌지만 화해로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3. 공의회와의 갈등
에우제니오 4세의 통치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젤 공의회 와의 다툼이었습니다. 공의회 지상주의와 교황권과의 갈등입니다. 교황의 의전 사제가 바젤의 환경에 대해 과장되고 부정적인 설명을 하자, 교황이 공의회의 전징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때마침 공의회에 소집된 인원이 얼마 되지 않자 12월 18일 바젤 공의회를 해산해 버리고, 볼로냐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는 칙렁을 반포합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교황이 멋대로 공의회를 해산해 버리려고 했으니까요 그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콘스탄츠공의외의 결의안을 갱신하고 교황보고 출석하라고 당당히 통보합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타협안을 마련합니다. 교황은 공의회 해산 명령을 취소하고, 공의회의 내용중에서도 교황의 권위를 깎어버린 칙령들을 취소합니다. 그리고 바젤 공의회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죠. 그럼 왜 이러한 조건들을 받아들였을까?? 교황령이 밀라노 공작과 콜론나 가문에 의해 침략당했기 때문이었죠. 간신히 탈출한 교황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군대를 규합해서 콜론나 가문의 항복을 받아 냅니다.
탈출하는 교황
4. 재기
1438년에 다시 바젤 공의회에 대항해 페라리-피렌체 공의회를 소집했고, 반발한 바젤 공의회측이 대립교황으로 펠릭스 5세를 올립하였으나, 잉글랜드, 부르고뉴 등이 프랑스 친화적인 바젤 공의회에 반발해서 교황을 지지하게 되고, 페린체의 지도자 코시모 디 조반디 데 메디치의 후원속에서 공의회를 강행합니다. 동방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교회의 일치를 합의합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성장에 맞서 십자군을 지원하였으나, 십자군은 바르나 전투에서 대패하고 체사리니 추기경이 전사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끝납니다. 대립 교황으로 선출된 펠릭스 5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해서 결국 바젤 공의회의 지지세력이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교황은 10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보내고 1443년 9월 28일에 로마에 돌아오게 됩니다.
5. 노예제도
카나리아 제도
그리스도교는 1430년대 초까지 카나리아 제도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왕국와 카스티야 왕국이 이곳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기 혼란기 주민들이 노예로 매매되는 일들이 시시때때로 벌어지게 됩니다. 이미 922년에 코블렌츠 지역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잡아 노예로 삼는 행위를 크게 규탄했었죠.
카나리아 제도의 교구장인 페르난도 칼베토스 주교의 탄원으로 교황 에누제니오 4세는 1434년 12월 17일 교황칙서 ( Creator Omnium) – 라틴어로 만물의 창조주 – 를 발표해 과거 이교도 지역이라는 이유로 포르투갈에게 허용했던 권리를 우선 취소합니다. 하지만 교황이 칙령이 도달하는데 오래 걸리겠죠. 그 동안에도 포르투갈의 약탈은 이어집니다. 그래서 1435년 1월 13일 교황이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전쟁과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의 금지를 더욱 강화한 칙서 Sicut Dudum – 라틴어로 오래전에 – 를 발표합니다. 에우제니오 4세는 식민지로 전락한 카나리아 주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규탄하고 노예로 만든 사람들을 즉시 해방시켜 주기 전까지 피의자들은 파문의 고통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6. 사후
에우제니오 4세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에 너무나 많은 사건사고가 존재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서 물리적으로나마 교황권을 서방교회 대분열 (1378-1417) 이전에 절대적이었던 시설로 되돌리는데 기여는 했습니다만 신성로마제국등 많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양보해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 유럽의 여러 군주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일이죠.
또한 몸가짐과는 다르게 행동이 미숙하고 우유부단 했고 감정적이었습니다. 이단자들에대해선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족벌주의를 개혁했습니다. 사생활은 엄격했으나 예술과 문학을 좋아했으며 1431년 로마 대학교를 재건합니다.
1447년 2월 23일 로마에서 선종했으며, 성 베드로 대성전 내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나중에 테베레 강 반대편에 있는 산 살바토레 인 라우로 성당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교황 에우제비오 4세의 조각상
7. 평가
교황으로 있던 시기 너무나 많은 사건사고를 겪은 교황입니다. 교회의 일치를 세운 것은 좋으나 어디까지나 군주들의 합의에 가까운 것이어서 나중에 교회의 세속화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왔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같은 기독교로라는 이유로 노예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린 것을 보면 인본주의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흥미로운 역사 소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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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더 잘쓰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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