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Calendarium
In 613, Eight-month-old Constantine is crowned as co-emperor (Caesar) by his father Heraclius at Constantinople.
613년 8개월된 콘스탄틴 – 이후 콘스탄티노스 3세 - 이 그의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즉위하다.
이라클리오스는 로마 제국의 66대 황제이자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창건자입니다. 로마 제국 최대의 적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제국을 구해낸 위대한 황제이지만, 한편으로는 신흥 이슬람 제국의 진공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져내린 황제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대에서도 찬사와 비난이 교차한 황제였습니다.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서로마 멸망한 것과는 관계없이 이라클리오스 전후 시기를 분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까지는 동로마, 그 이후는 비잔티움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이라클리오스 황제와 그리고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3세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나클리오스의 동전
1. 황제 등극 전
이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카르타고 총독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대 헤라클리우스 였습니다. 카르타고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총독이었던 이라클리오스는 그 당시 황제 포카스의 폭정이 심해지자 608년 제국의 곳곳을 다니며 2년동안 세력을 모으고, 610년 휘하 병력을 이끌고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습니다. 그당시 포카스는 하나뿐인 자신의 사위마저도 의심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어서 모든 귀족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이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높폴리스로 진격하여 포카스를 폐위하고, 610년 황제로 등극합니다. 그 당시 포카스를 붙잡은 이라클리오스는 직접 포카스의 목을 베고 시체는 여러조각으로 잘라서 사냥개의 먹이로 줬다고 합니다. 포카스의 동생인 코멘티올로스는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611년초정도에 부하에게 피살되어서 반란은 흐지부지 됩니다.
2. 제국의 위험
전임 황제 포카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제국의 방위체계 자체가 엉망이 되어서 사산조 페르시아가 진격하면 제대로 방어가 되지 않을것이 뻔했습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611년에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뺐기고, 613년 안티오크에서 격파당하고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 마저 빼앗겨서 성십자가까지 빼앗깁니다. 이거 뿐이 아니었습니다.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포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더 편의 칼케돈까지 도달합니다. 619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빼았기고, 621년에는 이집트를 완전히 접수하게 되죠. 622년에는 로도스 섬까지 빼았겨서 곡물 수송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이라클리오스는 시간을 계속 끌면서 자신의 부대를 훈련시켜서 계속 부대의 질을 높여 나갔습니다. 하지만 안좋은 일은 연달아 오는건지 서로마 지역에서 동로마-아바르 전쟁으로 일리리쿰군이 궤멸되고 맙니다.
오죽했으면 이라클리오스가 카르타고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합니다. 또한 619년 라벤다 총독인 엘레우테리우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를 수도로 하는 황제국을 세우려 했지만, 620년 병사들에게 피살되어 무위게 그칩니다.
3.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콘 – 정교회의 그림으로의 상징물 – 을 앞세워서 성전이라고 군사들을 격려하고, 교회에서도 많은 기부를 받아서 드디어 승부수를 걸게 됩니다. 마침내 이라클리오스가 이끄는 군대는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둡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로마내에 페르시아군을 어느정도 정리한 이라클리오스는 이제 페르시아의 중심부로 쳐들어 갑니다.
계속해서 승리를 거둬서 호스로 2세의 군대를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고, 여러 전과를 세웁니다. 빼았긴 여러 도시들을 수복하고 무사히 트레비존드로 퇴각하는데 성공합니다.
도시를 빼았긴 호스로 2세가 가만히 있을 수 없겠죠. 626년 호스로 2세는 아바르 족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해군력이 더 우월했으므로 연합군의 해군은 궤멸당합니다. 이때 이라클리오스는 군대를 세부대에 나누어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에 하나는 동생 테오도로스에게 주어서 아바르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몰래 진격합니다. 샤힌의 부대를 동생이 격파하고, 가는길에 서돌궐도 끌어들여서 페르시아를 공격했습니다.
로마 페르시아 전쟁 배치도
결국 니네베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라클리오스가 궁전까지 약탈하게 되자, 호스로 2세는 궁정 반란으로 축출됩니다. 결국 새로 왕에 오른 카바드 2세는 제국에 화친을 요청하였고, 이라클리오스는 모든 빼앗긴 영토를 되찼고 성십자가도 되찾게 됩니다. 당연히 이라클리오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죠. 원로원도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존호를 바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성십자가를 다시 찾아오는 이라클리오스
호스로 2세의 참수
4. 이슬람세력
625년까지만 해도 오합지졸이었던 이슬람 군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내세운 이슬람의 공세에 그동안 수복했던 영토를 대다수 빼았기고 맙니다. 또한 시리아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약이 많았던 로마 제국과는 다르게 종교적 자유를 약속하고 그 당시 이슬람의 지즈야가 동로마 제국의 징벌적 세금보다는 덜 가혹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조카딸과 결혼하는 만행에 가까운 짓을 저지르고 이슬람과의 싸움에서도 수적우위에도 계속 패하는 등 인기도 떨어지고 로마시민으로부터 지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결국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알렉산드리아가 공격당했다는 소식과 단의론에 대한 종교적 문제로 인해 분사 – 억울해서 죽음 – 합니다.
5. 콘스탄티노스 3세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는 어땠을까요?? 공동황제로 즉이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사촌인 니케타스의 딸, 즉 6촌누이랑 약혼합니다….. 음…… 마찬가지로 근친상간에 속하지만 촌수가 크기도 하고 그 당시 황제였던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조카와 결혼한게 임팩트가 훨씬 컷기 때문에 대충 넘어간 느낌이 있습니다.
결국 630년에 결혼해서 첫아들 콘스탄스(이후 콘스탄스 2세), 둘째아들 테오도시우스를 낳고 딸인 마얀도 낳습니다. 그리고 641년 아버지가 죽자 황제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세달만에 결핵으로 – 영문에서는 독살의혹이 제기됩니다. – 요절 합니다. 후임황제는 공동황제였던 이라클로나스가 이어받지만 이미 근친혼으로 인해 인기가 없어서 콘스탄티노스의 아들인 콘스탄스 2세에게 공동황제를 허용하고 결국 제위에서 폐위됩니다. 그리고 이라클로스와 어머니인 마르티나는 각각 코와 혀가 잘린채로 로도스 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죠
콘스탄티누스 3세의 동전
6. 평가
로마 제국의 위험을 구했지만 결국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철저한 준비성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성공적으로 잘 이끌어 나갔지만 이슬람 세력과는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말년에 로마 시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 근친상간혼을 함으로써 그 좋았던 평가를 한방에 날린 왕이기도 합니다. 항상 위에 잇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는게 매우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죠. 위기는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를 마무리 했다고 해서 다른 위기가 없어지는건 아니죠. 왜 권력을 쥔 사람들이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그 큰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망해버린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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