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인플레이션 하면 가장 익숙한 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우입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으킨 다양한 에피소드가 알려졌지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배상금을 마련하느라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는 간단한 설명이 가장 유력한 설명이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왜 배상금을 마련하는데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독일 정부가 전쟁 배상금 지급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재정적자를 정상적인 재정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만약 전쟁 배상금이 독일이 지불 가능한 수준으로 낮았었다고 하면 독일 정부는 약간의 증세를 통해 이를 지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상금은 1921년 1,320억 마르크로 매년 지불해야 할 배상금의 규모가 독일 GDP의 10%에 육박했습니다. 게다기 이 배상금은 독일 마르크화가 아니라 금이나 외화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국내에 금을 긁어모아서 지불하거나 무역수지 흑자를 통해 외화를 확보해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정부의 재정으로 이를 지불할 수 없으니 방법은 빚을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빚을 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독일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당시 중앙은행인 독일제국은행에 넘긴다.
- 독일제국은행은 이 국채를 받고 이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한다.
이를 정부 부채의 화폐화라고 합니다. 위 방식은 미국이 2007년 리만사태 때와 지금 코로나 사태 때 시행한 양적완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만 정확하게 본질이 같은 것입니다.
돈이 과하게 풀려나가고 물가가 오른다는 것을 느낀 기업과 시민들은 파국적인 인플레이션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빚은 늘리고, 상환은 늦추고, 화폐를 물건으로 최대한 빨리 바꾸고, 노동자는 임금상승을 요구하고... 결국 화폐유통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습니다.
고전경제학파의 화폐수량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M×V = P×Y
P= 물가수준, Y=실질 GDP, M=통화량, V= 화폐유통속도
위 공식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통화량이 아니라 통화유통속도입니다. 통화량이 급격하게 늘어도 화폐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는 현재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은 화폐유통속도입니다.
이를 요약하자면 정부가 급박한 상황에서 지출해야 할 돈을 증세로 마련할 수 없어서 화폐 발행이라는 교묘한 증세를 급하게 하다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입니다.
만약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이용한 입지전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후고 스티네스(Hugo Stinnes, 1870~1924)라는 사업가입니다.
독일의 재정 상태와 화폐 발행량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낀 이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에 은행의 융자를 최대한 끌어내 공장, 산업시설 같은 실물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상환은 미뤘습니다. 사업 대금을 받을 때는 유일하게 금본위제를 이탈하지 않고 있던 미국의 달러로만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산을 정부가 압류하기 힘든 중립국 네덜란드로 빼돌렸습니다. 물론 전시라는 상황과 정경유착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이 사람이 부를 늘린 방식은 타락할 것으로 보이는 화폐를 미리 회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를 쌓은 스티네스를 1923년 3월 타임스지는 '독일의 새로운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영끌을 해서 부동산에 투자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이 사람은 혁신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는 기업가상으로 볼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 사람의 행동에서 인플레이션에 대비할 지혜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타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불환화폐를 실제 재화를 생산하는 실물자산(예를 들면 공장)으로 미리 교환함
- 금으로 태환되는 달러로만 대금을 지급받음
- 자산을 정부나 권력자가 압류할 수 없는 곳으로 분산해 놓음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한 정부 부채의 화폐화는 2007년 이후 미국, EU,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이 남발하고 있습니다. 주요 국가들이 동시에 시행하는 바람에 특정 국가의 화폐타락이 돋보이지 않았고, 이들 주요 국가들은 주변국가로 인플레이션을 수출할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앞으로 올 경기침체에도 각국 정부는 돈을 푸는 것을 멈출 수 없을겁니다. 오히려 중앙은행을 이용해 시장에 돈을 푸는게 아니고 재정정책으로 직접 돈을 푸는 방식을 취할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아니더라도 인플레이션에는 대비하고 있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위 글과 다른 글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