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허공의 몸을 찾아서 "불교방송 교리강좌 강의(안)"
저 자: 석지명
P.463 불각(대승기신론)
근본 일심이 흔들려서
망념을 일으키고
그 망념으로부터 삼라만상이 벌어진다.
이 미혹에 의해 업을 짓고
업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이 윤희의 과정을
기신론은 깨닫지 못하는 불각 不覺이라고 부른다.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 시각 始覺인데
그 과정은 망념의 생주이멸 生住異滅
즉 나고 머물고 바뀌어지고 없어지는 상태를
여실히 관찰하는 과정이다.
깨닫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의 진여가
오직 하나이면서도
온 법계 전부임을
여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상태에서는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서
그에 따른 비교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비교심은
상대적 빈곤감이나 상대적 불행감을 같게 한다.
그러나 그 망념 妄念은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에 부수되어 있을 뿐이다.
길을 잃은 사람은
갈 곳을 정했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
가야 할 방향이나 갈 곳을 정하지 않는다면
길을 잃었다는 말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생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길을 잃은 것은
충족될 수 없는 상대적 목표를 정해 놓기 때문이다.
만약에 상대적 목표가 없다면
실패할 것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벗어난다면
구태여 새삼스럽게
참된 깨달음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깨닫지 못한다는 불각의 근본적인 뿌리는
마음의 진리자리 하나가
온 세상 전부인 것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그전에 공부한 유식의 도리,
즉 마음이 주관·객관으로 분열되어서
세상을 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분열되어서
나라는 주체도 만들고 객관세계도 만들지만
사실 주관과 객관은 다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하나이면서도
이 세상 전부인 것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억지를 부리고
억지를 부리면 무리가 따른다.
몸과 마음이 괴롭다.
어떤 성취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과 성취가 비교될 때
그 성취는 항상 부족하다.
성취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불행하다.
한 마음이
주관·객관으로 분열해서
온 세계가 벌어졌다는 도리를 모르는 데서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불각의 발단이 있다.
그래서 기신론은
길을 잃은 사람은 갈 곳을 정했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고 말한다.
마음이
주관과 객관
세상만사 모든 것임을 안 마당에는
새롭게 깨달음을 찾아 나설 것도 없다.
깨달음이라는 갈 곳을 정하지 않았으니까
잃어야 할 길도 없어진다.
불교에서의 무명은
부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처님이 내린 벌도 아니고
부처님이 있게 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무명이란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중생이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그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그 무명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로 보고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무명은 없는 것이다.
분열된 주관·객관으로 인해
안다는 마음이 생기고
그 앎이 지속되어 굳어진다.
그 앎을 당연시해서 집착하고
그에 의해 새로운 개념과 언어와
가격표 붙이기가 일어난다.
이어서 업을 짓게 되고
그 업의 결과로 과보를 받게 된다.
미혹과 악업과 괴로운 과보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깨닫지 못하는 불각의 세계
즉 윤희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여섯 가지 거친 지말불각이다.
기신론은
깨닫지 못하는 불각의 원인,
한 마음이 바로 온 우주법계라는 것을 모르고
밖으로부터 행복을 찾겠다는
망념을 일으키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 망념을 멸하는 과정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 된다.
망념이 일어나서 없어지는 과정은 생주이멸,
즉 나고 머물고 변덕을 부리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망념을 없애는 데는 그 반대방향으로부터 시작한다.
밖에서 구하려는 망녕된 생각의 없어짐과 바뀌어짐과 머무름과 생겨남을
차례로 없애는 것이 바로 깨닫지 못함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시각의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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