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측에서는 남편에게 심장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했다. 남편의 왼쪽 심장에서 출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 수술을 완고하게 거부했고, 그 사실을 나에게는 알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남편의 병실로 향하던 도중 한 간호사가 나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어떻게 됬을지는 안봐도 뻔했다. 나는 남편에게 울며불며 악을 썼다.
수술을 왜 안받으려 하느냐고, 그깟 수술비 내가 못해줄것 같으냐고, 혼자 남을 나는 어떻게 생각도 않느냐고 남편을 책망했다.
그 때도 남편은 아무말이 없었다. 그 더러운 목숨 값 때문에 남편이 수술을 받지 않으려고 하고, 나에게 숨겼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그 행동들이 정당화되지는 않았다.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했다. 그때까지 해온 식당일만으로는 남편의 수술비까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니던 식당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돈을 많이 벌수있는일.
그것이 힘겹고 고달프더라도 남편의 병원비를 댈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는 일.
남편과 나의 '생존'을 유지시켜줄 수 있을만한 일자리가 절박하게 필요했다. 그 후, 나는 주변의 모직물 공장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술집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그 곳에서 제시하는 일당은 내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나는 주변의 공사현장들을 찾아나섰다. 현장을 둘러보고서는, 옷이 말끔하고, 직위가 높아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나를 일꾼으로 꼭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여자는 곤란하다고 머리를 긁는 사람,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콧방귀를 뀌고, 심지어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거절을 당할 때마다 나는 다음 공사현장을 찾아 거리를 나섰다. 여러 번 거절을 당하고 나니 점차 마음이 초조해져, 어떤날은 뒤돌아 공사판으로 걸어가던 사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기도 했는데, 나에게 그런 용기와 뻔뻔함이 숨어있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그 사람도 사람인지라, 숨이 넘어갈 듯 절박해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선 동정심을 느낀것인지 마침내 나를 일꾼으로 데려다 써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공사장에서 맡은 일은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자로서, 무언가를 나르고,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하는 것은 힘에 부치기도 했고,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 일들을 해야 할 경우도 있었는데, 그 곳의 인부들이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때가 그런 경우였다.
물건이 잔뜩 담긴 수레를 가리키고선, '저것을 끌고와라'라고 시키면, 나는 그것을 끌고 그들 쪽으로 가야했다. 이마의 수건이 땀에 다 젖도록, 이를 악물고 그것들을 옮기고 나면 그 인부들은 '이제 필요없으니 도로 갖다 놓아라.'라고 말하며 나를 조롱했다.
내가 낑낑대며 짐을 옮기는 모습을, 그 남자들은 재미있어했다. 또 그런 일들을 할 때에 내가 자신들을 한참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비웃었으며 웃기지도 않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살던 할머니의 집을 뛰쳐나올 때 지키고자 다짐했던 자존심은 그렇게 일순간에 철저하게 뭉개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외면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생존'에 방해가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가끔 할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나는 그 전화가 받기 두려웠다.
' 잘살고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도저히 온전한 목소리로는 대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울먹임을 숨긴다고 숨겨보았지만, 눈치를 챈 것인지 할머니는 '할미가 해준게 없어서 미안하다.'라는 말로 항상 전화를 끝맺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는 눈물이 터져나와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하게 눈치가 보이는 그 공사장에서 나는 먼지와 페인트가 묻은 손으로 그 눈물을 재빨리 닦아내야 했다. 하지만 홀로 방안에 틀어박혀 그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나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쉴 새없이 떠올라 눈물을 멈추지는 못했다.
세상은 내가 절망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지독하리만큼 냉정했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보이면 인부들은 걱정어린 말은 커녕, 힘들면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알아보라는 말로 쏘아붙였고, 일을 하고 난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남편의 병실에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병원비 독촉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그 고단한 삶도 남편이 내 옆에서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버틸 수 있었다. 남편이 언젠가는 건강을 되찾아 다시 예전처럼 편안하게 내 옆에서 숨쉬어 주리라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