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댐을 지나 예봉산 동쪽 자락 남한강변길로 차를 몰았다. 댐에 가둬진 물 위로 내려앉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수면은 잔잔해 비닐장판을 펼쳐놓은 듯 하다.
퇴촌 도마치 삼거리에 이르러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 방향으로 핸들을 틀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엔 마시멜로를 닮은 볏짚말이가 띄엄띄엄 놓여 있다. 짚단을 쌓아 올린 짚가리 대신 등장한 새로운 들판 풍경이다. 짚단은 땔감과 소여물로 유용했는데... 이젠 옛날 얘기다.
도로 위 낙엽이 연신 흩날리며 가을의 끝자락을 알린다. 절기상 오늘(14일)이 立冬과 小雪 중간 쯤이니 이미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건만 붙잡아 두고 싶은 계절이다.
도로의 막다른 지점에 이르자, 탁트인 너른 터가 펼쳐진다. 바로 천진암 천주교 성지이다. 성지 뒤로 병풍처럼 둘러진 앵자봉 능선이 소잔등처럼 푸근하다.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산세라 하여 '꾀꼬리 鶯'을 써서 앵자봉이다. 앵자봉 산자락에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되기시작해 지금은 이 일대가 천주교 성역 순례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 어릴 적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昔我童時遊),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尙書此燒鍊)! 더우기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豪士昔講讀)"
1827년에 65세 된 정약용 선생이 옛 동료들과 함께 천진암을 찾아 추억을 회고하며 현장에서 지은 시다.
이곳 천진암은 정약용이 열일곱 나이되던 1779년에 약종, 약전 형제와 이승훈 등이 모여 당시로선 생소하기 이를데 없는 천주교 관련 책을 읽고 토론했던 곳이다.
서당이나 온전한 사찰에서 토론할 내용이 아니었던지라 폐허가 된 천진암이야말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더없는 장소였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천진암은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부상했고 지금 100년 대역사의 천주교 성지로 조성 중이다.
너른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은 달랑 4대가 전부다. 접근성이 좋지않아 발길 뜸한 산이란 건 진즉 알았는데, 코로나 확산세와 미세먼지 '나쁨' 예보에 다들 지레 겁 먹었나 보다.
들머리에 세워진 등산코스 안내판을 보며 오늘 걸을 코스를 입력했다. 능선을 둥글게 돌아 제자리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택했다.
천진암 성지 오른쪽 계곡엔 청소년 야영장이 들어서 있다. 출입문을 비껴 오른쪽 소로를 따라 50여 미터 정도 진행하자, 비로소 산길이 열린다.
황갈색 숲길로 들어섰다. 성질 급한 나무는 그새 잎을 모조리 떨궈 냈다. 떡갈나무, 박달나무, 쪽동백나무, 굴참나무들이 서둘러 겨울 채비 중이다. 싱그러운 녹엽은 잠시 홍엽으로 왔다가 낙엽으로, 다시 새 봄 새 잎을 틔우기 위해 부엽토로 변신한다. 숲은 비움과 채움의 순환이다. 삼라만상의 이치다. 앙상한 잔가지 사이로 시린 바람이 지난다. 특히 이 계절에 홀로 산에 들면 담박해지는 기분이 들어 좋다. 수북히 쌓인 낙엽이 발바닥 아래서 연신 바스락댄다. 푹신하기가 카펫 위를 걷는 느낌이다.
산길은 낙엽에 묻혀 희미하다. 그럴땐 한 걸음 물러나 호흡 한번 가다듬고 심미안으로 바라다보면 반드시 길은 보인다. 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좁아질 듯 다시 넓어진다. 곧다가도 휘어지고 희미하다가도 뚜렷해진다. 오름길 다음은 반드시 내림길이 있다. 길은 곧 인생이다.
삼거리다. 곧장 진행하면 관산(2.7km), 무갑산(4.39km)이다. 한번씩 걸음했던 산이다. 앵자봉(2.7km)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완만한 능선길이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동남쪽 산아래로 이스트밸리CC가, 북서쪽으로 천진암 성지가 내려다 보인다.
호젓한 낙엽길을 줄곧 그림자와 동행 중이다. 박석고개에 이르는 동안 간간이 골짜기를 훑고 지나는 옅은 바람도 동행을 청한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가 아니라 '낙엽을 헤치며 걷는다'가 맞다. 낙엽이 발목 높이까지 쌓여 맨바닥의 요철을 가늠키 어려워 헛디뎌 발목을 삐기 쉽다. 도리 없이 양발을 끌면서 낙엽을 헤쳐가며 걸었다. 낙엽에 묻혀 길이 사라지면 나무에 매달린 하얀 리본이 안내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봉우리가 올려다 보인다. 앵자봉(鶯子峰, 666.8m) 정상이다.
천진암 주차장을 출발해 예까지 오는 동안 단 한사람도 볼 수 없었는데 정상 데크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중년의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들 역시 산에 올라 처음 만난 사람이 나라고 했다.
주말의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은 넘쳐나는 산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반면 조금만 서울을 벗어나면 이처럼 한적하기 이를데 없는 호젓한 산길을 탐할 수 있다.
북서쪽 퇴촌 너머로 자주 걸음하던 검단산과 예봉산이 하늘금을 긋고 서쪽으로는 관산, 무갑산이 또렷하다.
양자산 방면 목계단으로 내려섰다. 아침까지만 해도 뿌옇던 하늘인데 정오를 지나자 씻은 듯 파랗다.
앵자봉을 600여 미터 벗어난 곳, 갈림길 이정표엔 왼쪽으로 '등산로', 오른쪽으로 '양자산'을 가리키고 있다. '등산로'라 쓰여진 쪽을 택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양자산 방향으로 더 진행했다가 천진암 방향으로 꺾었어야 걷기 좋은 완만한 산길이었는데)
이 길은 유난히 가파른 급사면인데다 수북한 낙엽 아래는 마사토라 빙판이나 다름없다. 발 딛기가 무섭게 미끄러져 내린다. 맥없이 발라당 자빠지길 수차례, 천신만고 끝에 계곡에 이르렀다.
갑자기 산길 이정표는 사라지고 천주교 성지 관련 이정표가 대신한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파란 하늘을 천정 삼아 푹신한 낙엽 카펫 위에 드러눕고 싶다.
텔레파시기 통했나? 때마침 같은 시간 청계산을 산행하던 산우가 깨똑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