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에 대한 고찰 #4] 낡아버린 질투의 냄새

in kr •  7 years ago  (edited)

movie_image.jpg

남편이 그녀와 친하게 지낸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심정이란.

정말 오랜만에 하릴없이 일찍 문간에 들어섰을 때 두런두런 두 사람이 대화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진중한 것 같기도 한 그 흐름에 불쑥 내가 침범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엄습했다. 말 없이 조용히 문을 닫고 차마 신발은 벗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달팽이관을 평소보다 두 배는 커다랗게 부풀린, 마치 사나워진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사모님이 그런 말씀도 하시나봐요."
"예전에 그리 말했죠. 한창 연애 비스무리한 걸 할 때."
"비스무리한 건 또 뭐람."
"아내는, 연애를 아주 싫어해요."

그는 내가 가장 당당했을 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 언젠가부터 몸을 섞고, 그 이후로 줄곧 별 탈 없이 함께였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몸으로 그의 우에 올라서 온통 그의 몸 속을 헝클어놓을 때 여자를 다 갖지 못한 아쉬움을 잊는 그 표정을 보며 묘한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자꾸만 나를 가지려 했던 남자들, 그 남자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으려 아우성치던 자신의 지난 날을 보상받듯 난 그를 내 맘대로 쥐어 흔들 수 있다는 걸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했다.

애초에 두 점을 잇는 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우린 결혼한 후에도 자유로왔다. 모래알처럼 부스러질 것 같지만 결코 멀어지지 않은 채 한 지붕에서 둘이 있기로 다짐했다. 혹은 나무를 받치는 땅처럼 언제나 묵직한 느낌을 주는 그는 내가 임신했다는 말에 정말 무거운 낯빛을 했었다. 나는 너무나 가벼운 표정으로 원하는 대로, 맘대로 하라고 오히려 객기를 부렸고 그는 내가 괜찮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대답했다. 내가 괜찮다면, 내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그는 이미 내 위악에 길들여진 터였다.

그렇게 비겁하게 나 먼저 도망칠 채비를 하고, 그 불안으로 상대방을 붙박아 둔 찰나

그 찰나 같던 세월이 아주 조금 흘렀을 뿐인데 그는 지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며 그윽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잘못은 없었다. 다 내 지난 상처와, 그 상처에 혐의가 없는 그가 장발장이 돼 옥살이를 한 까닭이 컸다. 나는 그의 경계 없는 애정 속에서 꽤 오래토록 내 멋대로였던 것 같은데, 이제 그 자유를 상환할 때가 온지도 모른다. 내가 평소에 말하던 바와 같이 이제 우리 점처럼 사랑했던 대로 점처럼 흩어져, 각자의 바람을 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이게 그리 섭섭하게 느껴지는지 알 길이 없다.

여전히 문간에 묵묵히 선 채 들어가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할 수 없는 나였다. 그들이 입맞춘 것도 아니고, 살을 맞댄 것도 아니고 그저 말을 주고 받을 뿐인데 왜 내 안에서 어떤 불이 일다 못해 터질 것 같은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닌 맹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꽤 능숙하게 흡수했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 여지를 채 지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건 그의 탓이 아닌 내 탓인데 왜 심장 어디쯤에서 그가 그녀의 생각을 듣고, 웃고, 응답한다는 걸 견디지 못하겠다는 분이 나는 것일까.

순간 머리가 어지럽더니 핑그르- 피가 흘렀다.

가끔 제 피를 보게 된 건 얼마 전부터였다. 서먹하지만 평온하다고 착각했던 날 동안 몸 속 어디쯤에 무언가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낭창낭찬한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내 몸은 이제 늙었고, 낡았고, 부서지고 있었다. 의사는 못 알아들을 이름을 대며 다음 예약을 잡아줬고, 나는 오늘에야 다시 어떻게든 막아왔던 삶의 구멍을 대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마침 그걸 말하고 싶은 밤에 그는 다른 그녀와 저녁을 먹고 있다. 아니, 저녁 먹는 건 문제가 아니고 얘기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진실한 것 같은 그의 목소리는 내가 예전에 잃어버렸던 그 무엇이었다.

질척한 피가 결국 턱 끝까지 흐른 뒤에야 나는 혼미했던 정신을 다소 잡을 수 있엇다. 하필 이렇게 이유 모를 비참함에 휩쓸릴 때즘에 공교롭게도 내 피가 얼굴을 비집고 나오다니. 사람이 살며 결코 자기 몸 속에 흐르는 피를 볼 일이 많지 않은데, 하필이면 내가 가장 멀쩡한 표정을 짓고 싶을 때, 나는 비겁하지 않고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에 내가 꾸역꾸역 우겨넣었던 내 본성의 과오를 뚝뚝 흘리고 말았다. 그의 말씨는 나긋했고, 행복해보였다.

나는 오늘 밤 내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까. 항상 점처럼, 너무나 허무하게 사랑하자고 단언하던 내 삶은 겨우 이 한 장면으로 흔들릴 수 있는 걸까. 다 내 짐작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밀려드는 두려움은 무엇일까.

코피를 손수건으로 쓱 닦아버렸다. 따지고 보면 한번도 평탄치 못했던 인생이었고, 아직 그가 날 버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우기고 싶다. 일부러 구두를 요란하게 벗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집안은 따뜻하고, 낯설었다. 내가 일부러 사랑해버리지 않았던 것들의 침략은 이렇게 일순 내 안의 겁쟁이를 꾸짖고 있었다.

사랑에 그악스럽던 내 고집도 나이가 들어 한풀 꺾일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Take.This.Waltz.2011.x264.DTS-WAF.mkv_20150128_051303.655.jpg

20151010 #쮼 #4편

하단 이미지는 영화 '우리도사랑일까'의 한 장면.
3편 마지막 이미지도 이걸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ㅎㅎ

정말 아름답고 비참한 영화라 꼭 추천하는 작품 중 하나랍니다
저도 꾸준히 정진해서 온갖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