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민족주의?

in k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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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나는 지금까지 민족주의 및 그에서 비롯되는 마녀사냥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성은 민족이라는 멍청한 개념 및 애국주의적 담론에 놀아나기에는 영리하고 냉소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전직 민족 투사 조르바가 숱한 바보짓 끝에서야 깨달은 것을 여성들은 태생적으로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사실은, 그저 남성들이 너무 나대서 여성들이 나서지 않았을 뿐이 아니었을까? 그저 남성들이 너무 요란했던 나머지 여성들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이란 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오히려 현재 한국 여성은 각종 정체성의 매듭 자체에 대해 극히 맹목적이고 폐쇄적인 추종 경향을 보이고 있지 않나? 정체성이라는 장치의 진보성과 해방성과 정의와 공감만을 부르짖으며,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 정체성의 이름으로 목 조르는 개인은 간과하고 외면하는. 매듭의 함정. 여성들에게는 피해자-정체성의 매듭이 그들의 집단 인식과 의미를 조직하는 의심할 수 없는 장치로 체화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개는 흑백이다.

오늘날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독립된 개인을 욕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개인은 오히려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이 약자-피해자-자매-우리-역사에의 공감과 연대를 거부하는 이기적 인간으로 찍히고 부털당한다. 예컨대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전범국 국민이 침략과 무반성의 시기(?~?)를 어떤 비판과 반성 의식도 없이 담담하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페미니즘 및 정체성 운동의 단골 논리가 된 결벽증이다. 무관심, 무신경, 무식 자체가 죄다. 피해자가 기분 나쁘면 죄다. 너는 순수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의 글자기 때문이다. 잠재적 가해자들, 전직 가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명예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윤김지영은 아이유가 강력한 대중적 파급력을 가진 연예인으로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 무관심한 자체가 비판받을 만한 이유고, 그 쏟아지는 비판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최근 여성들의 좌우명은, 개인을 무매개적으로 정치화하는 정체성 정치에 의해,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 영역 자체가 무매개적으로 잠식되고 단죄되는 결과에 다다랐다. 네가 오랫동안 정치를 들여다보면, 정치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이 결벽적 공기를 맡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결벽증이 운동에 가장 유용한 매듭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잔인하고 지속 불가능하기에 더더욱 매력적이고 유용하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삶에서 먼저 철저히 실험되고 실천되고 조형되어 권유되는 필로소피아가 아니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강요하는 역사-혁명이기 때문이다. 역사-혁명은 세계를 둘로 가른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가해자에게 잔인한 결벽증을 부리는 것은 지고의 쾌다. 나는 피해자로서 그럴 권리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을, 적을 묶고 조름으로써 조형된다. 물론 그 매듭을 스스로에게 적당히 돌리는 척을 하고 인증하면 그야말로 근사한 현대적 패션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코르셋과 하이힐은 얼마나 훌륭한 아이템인가? 현재 여성들은 타이트한 집단 결벽증적 패션에 심취해 있다. 그것이 그들의 개인이다.

젊은 여성들의 지지율이 높은 진보 정권이 어느 정도 민족주의를 주도하는 포지션에 서 있는 현 시국 역시 영향을 줬을 것이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 종교긴 하지만, 그래도 누가 제사장 노릇을 하느냐에 따라 다소 색조가 바뀌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적 감정에 대한 반박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여초 커뮤니티의 구조적 폐쇄성 역시 빼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감정과 공감이라는 개념이 신성불가침의 절대 권력으로, 심지어 진보적 개념으로 작용하는 '여성적 반지성주의'는 더 비판적으로 논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개인은 녹아내린다. 이 모든 것이 피해자-정체성이라는 매듭에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나에 대한 비판이 논파되자 계속해서 문제 되는 지점을 교묘히 바꾸며 자기 정당화를 하는 모습은, 여초 커뮤니티의 폐쇄적이고 병적인 구조적 성격만이 아니라, 이 문제가 여초 커뮤니티와 남초 커뮤니티의 대리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데서도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앞으로도 수많은 담론과 여론전이 이런 수면 밑의 대립에 의해 직조될 것이다. 정체성과 진영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 냉정하고 건강한 비판 의식과 자정 능력이 요구된다. 그를 위해 독립적인 자의식이 요구된다. 그런데 그런 비판이야말로 정체성 정치와 역사 담론이 가장 혐오하는 것 아니던가? 공감하고 힘을 모아도 부족할 때에 꼭 그런 소리를 해야 해? 더군다나 독립적인 개인이라니? 이 점에서 자칭 안티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거울쌍일 뿐이다. 다른 주장을 할 뿐 아니라 다르게 주장해야 한다. 적이 될 뿐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남성 집단은 각종 민족주의적 지랄을 앞장서서 떨어 대며 부끄러운 과거의 교훈을 어느 정도 축적하고 체화했다. 2011 아시안컵 한일전에서 기성용이 득점 후 원숭이 세리머니를 하자, 「과거의 피해자가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게 뭐가 문제냐?」 「과거사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과거사 반성이 없는 현재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한국과 일본의 객관적 국력 차를 고려하면,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저항적 퍼포먼스로 봐야 한다.」 따위의 옹호 여론들로 들끓던 게 남성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성용의 그 건은 언급하기 곤란한,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인종 차별 행위로 남성 집단 사이에서 공인됐다. 예외 없는 보편적 법과 함께할 때만 저항도 유의미하게 지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각종 민족주의적 광기를 주도하는 건 남성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그에 대한 냉소와 비판의 목소리 역시 축적되고 있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건설적인 방향이 아니더라도. 남성 집단에 체화된 민족주의의 의미망은 아직 많은 덩굴과 화약을 남겨 두고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반면 여성 집단은 덜 데었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담론 수준의 조야함과 무식함을 보라. 지금의 냉소적 남성들이 혈기 끓던 어린 시절에 보여 주던 그 모습 아닌가? 「관중석에 있는 육일승천기를 보는 내가슴은 눈물만 났다.」 어느 누구도 집단 정체성의 연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식의 결벽증 역시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 아닌가? 그러나 앞서 본 각종 요소들을 고려하면, 여성들의 조야한 민족주의적 광기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남성들의 사례만으로 유추할 수 없다.

물론 여성 개개인은 영리한 동물이기에, 지나치게 과열되어 자기 몸을 태우기 전에 일신을 부드럽게 빼낼 것이다. 그들이 개인 차원에서도 지나치게 남성-우둔화된 것이 아니라면.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가능해진 여성-집단 감정의 실시간적이고 광범위하고도 폐쇄적이고 정파적인 생산은, 각종 정체성 운동에 있어 중요한 힘의 흐름으로 작용해 왔고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그 방식으로 개인도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성들의 전유물 같았던 민족주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양상이 지금까지의 남성 주도 민족주의와 다를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고도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여성적 반민족주의, 여성적 개인은 과연 어떤 형태로 등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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