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바람

in kr •  6 years ago 

Magritte. Rene. The Castle of the Pyrenees, 1959_B85_0081.jpg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이미지 출처)

일제 강점기는 암흑의 시대. 그러나 '근대'는 특유의 감성을 가진 아름다운 시대. 민족 정기를 해치는 벚꽃을 뽑자! 아, 역시 봄은 벚꽃이지. 사실 벚꽃은 한국 원산이야. 그러니 벚꽃을 즐기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우리의 전통 문화를 말살하고 흉물스런 폐허만을 남긴 일제! 아, 내 취미는 근대 건물들을 찾아다니며 찍는 거야. 모든 흑백 원리주의의 큰소리는 역사의 바람 앞에서 우스워진다. 물론 오늘날 불고 있는 것은 역사의 바람보다는 자본의 바람이라는 점이 또한 우습지만. 하여간, 심지어 겨울조차 죽음만을 남기고 갔을 리는 없는 것이다. 결국 현대 한국인은 싫든 좋든 반쯤은 일제의 후손이다.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적 혐그리스도교도들이 고전 그리스·로마뿐 아니라 '암흑 시대'의 후손이기도 하듯. 그것을 부정하면 자기를 이해할 길은 영영 없다. 심지어 제대로 된 비판조차 오직 이 경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검은칠은 그 악함의 본질조차 가리기 때문이다. 금기가 아니라 탐험을 통해서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분열증적으로 좋아하는 근대-일본 문화 자체의 역함에 도달할 수 있다. 중세의 역겨움은 중세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있듯. 지금까지 악과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어 왔던 선(예컨대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비로소 구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과서적 이지선다의 구조. 결을 거슬러 올라가며 새로운 결을 만들지니. 그러나 한국인들은 암묵적 죄책감을 떨쳐 내기 위하기라도 하듯, 혹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일 '정치적 문제' 때문이든, 일제에 대한 검은칠에 제기되는 조금의 의문에 대해서도 집단 발작을 일으킨다. 감히 누구도 이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지만, 또한 한국인이라면 누가 이 공기를 모르겠는가? 이것도 레드 콤플렉스라면 레드 콤플렉스다. 옹호 측이 언제나 「아직은 시기상조」를 지껄인다는 점에서도. 보수든 진보든 레드 콤플렉스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꼬? 후자는 현대의 주류 도덕적 세계관과 결합하기에 더 세련돼 보이고(반면 전자는 얼마나 틀딱스러운가?) 더 위험하다. 자연과 역사와 건강은 무한한 이해와 생산의 길을 열어 놓는다. 역사의 바람에는 울타리가 없다. 다만 사람이, 민족과 국사와 현대적 도덕의 끈이 견디지 못할 뿐. 그러나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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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 nice. Quite the chunk of real-estate.

B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