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세수가 싫다. 샤워가 싫다. 비가 싫다. 그 속에서는 무방비의 나체가 되고 만다. 쏟아지는 방울, 살갗을 흘러내리는 방울 하나하나를 의식한다. 그러나 언제나 방울은 눈동자보다 많다.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방울이 툭 굴러떨어지며 스며든다. 온몸이 얼어붙고 동시에 덜덜 떨린다. 눈동자들이 일제히 균열로 향하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방울들이 곳곳에서 달려든다. the panic the vomit. 그럼에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무너지고 와해된 엉망진창 형태를 어거지로나마 추스를 수밖에 없다. 살아야만 하기에. living in the rain. 덜 익은 레몬즙이 입 안에서 감돈다.
그러나 기분 좋도록 따사하고 건조한 햇살 역시 튀고 흐르며 스며들지 않는가? 문제는 물과 햇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과 맺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비에 지친 고양이는 햇살을 폭음하지만,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여자는 허겁지겁 그늘을 찾는다. 햇살은 검게 만들고 트러블을 만들며 주름을 만드니까. 그러나 문제는 아이의 무구한 얼굴을 비추는 햇살이 아니라 하얗고 매끈한 모델에 있다. 태양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하얀 가면에. 우산(casa) 속의 고양이는 온몸의 털을 한껏 곤두세운다. 곳곳에서 튀는 방울방울마다 축축함, 냉기, 냄새, 질병, 고장 등의 얼굴로 웃고 있다. 그러나 공격은 없다. 날카로운 끝을 가진 우산이 있을 뿐이다. 우산은 고양이의 자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그 확장을 차단한다. 그러나 물방울은 내가 될 수 없는 걸까? 나는 우산 속에서 완벽하게 마른 채 있어야 할까? 누가 깨끗하고 냄새 없는 고양이를 요구하는가?
고양이는 비를 싫어하는 만큼 관계도 싫어한다. 관계 역시 통제할 수 없이 튀고 흐르며 때로는 축축하게 때로는 차갑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물의 다른 이름이 오염인 것처럼 관계의 다른 이름은 상처다. 둘 모두 벌레를 피운다. 그래서 고양이는 하루 종일 실내에 머무르며 따뜻한 벽난로 옆에서 고고하게 책을 읽는다. 충만하도록 하얀 우유를 마시며. 소위 집사들은 고양이를 그렇게 그려낸다. 그들은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있다. 고양이의 발톱은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고양이는 공기인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흐르지 않는다. 그들은 하얀 모래 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막은 아름답다. 그곳에는 생명이 없으니까.
때때로 고양이는 살아난다. 흐르는 소리와 창에 맺히는 액체에 반응하여 고양이의 붓도 축축해지고 끈적해진다. 창을 하얗게 칠한다. 물은 어디에나 있구나. 우울이 내리는 날과 우울이 씻기는 날. 물론 한때의 감상일지도 몰라. 언젠가 또다시 온몸에 곰팡이가 슬고, 몸서리를 치며 우산으로 가시를 세울지도 모르지. 그러나 좋다. 내일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이다. 젖음에 대한 책임이 없듯. 물방울이 계속해서 창가를 톡톡 두드리며 흘러내린다. 집사가 바실리를 찾는다. 집사 앞에 놓인 캔버스는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림이 반쯤 되어갈 때 그만두고 새로운 하양 앞에 앉았다.
그러나 곳곳에 진흙을 묻히고 물을 떨어뜨리며 냄새를 풍기는 개는 얼마나 추한가. 바실리의 붓끝에서 흐른 방울을 자유라 한다면, 개의 털에서 흘러내리는 방울을 야만이라 한다. 영혼을 끌리게 하는 까다로움이 있다. 그 까다로움을 섬세함이라 부르며, 섬세함의 체계를 문화라 부른다. 인간은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형태를 만들고 분위기를 빚어낸다. 그러나 빗물은 토양을 쓸어버린다. 모든 걸 받아들이면 어떠한 형태도 없다. 냄새만이 날 뿐. 도기와 물의 관계.
양편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유. 물은 '적당히'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려는 순간 너무 지나치게 젖어버린다. 물에 발을 딛는 순간 빠진다. 물에는 반석이 없다. 인간은 왕(basilískos)이 될 수 없다. 반대편에선 강박적으로 메마른 우산 속을 물방울 하나가 조소를 띠며 지켜보고 있다. 아아, 단단하게 말라붙은 만큼 더 쉽게 쪼개질 거야. 그래서 적당한 선을 그으려 하지만, 튀고 스며드는 물은 어떤 선도 교란한다. 경악한 사람들은 반대편의 극단으로 도피한다. 물 위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크게 튄다. 물은 적당히를 요구하면서도 모든 적당히를 무화시킨다.
레테의 양면. 때로는 우산을 잊어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진다. 때로는 우산을 날카롭게 치켜세움으로써 형태를 만들고 분위기를 자아낸다. 끊임없는 교차. 그러나 그 교차는 고정된 양편의 갈마듦이 아니다. 몸 위에서 혹은 우산 위에서 흘러가는 것은 물방울만이 아니다. 왕(basileús) 자체가 물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망각되고 새롭게 곤두서면서 하염없이 흘러오고 있었다. 순간 다시 구토감에 사로잡힌다. 우산 안에 있었던 것은 누구고 우산을 잊어버린 건 누구지? 구멍 뚫린 하늘은 비를 흘리고, 눈을 찌를 듯이 날카로운 우산이 덩그러니 물 위를 떠돌고 있었다. 본체라고 혹은 방어막이라고 믿었던 껍질은, 물 위에서 눈 없이 홀로 떠다닐 때는 더없이 역겨운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아니었다. 바다를 구획하고 의미와 가치의 좌표를 분배하던 해도(atlas)가 물 위에서 거품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거품이 소리를 내며 유혹한다. 정말로 구역질 나는 것은, 내가 지금 저 물 속에 있지 않고 중력 속에서 우산에 잡힌 채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침이 튄다.
물은 멈추게 하지 않는다. 물 위에 떠 있는 세계는 멈추지 않는다. 나침반이 팽팽 돈다. 왕의 방랑에는 끝이 없다. 물 위에서의 40일은 끝나지 않는다. -Q-U-A-R-A-N-T-I-N-E- 멈출 수 없다면 움직일 수도 없다. 지도를 완성할 수 없다면 그릴 수도 없다. 물 위에서는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기에 아무 의미도 있을 수 없다. 사막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 건조한 품에 안겨야 한다. 왕은 멈추는 것을 상상한다. 숨을 멈춘다. 그러나 멈출 때 몸은 영영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숨을 들이쉰다. 코에 물이 맺힌다. 팽팽히 펴진 하얀 신경 위에 물이 튄다. 무너진다. 흐른다. 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아아,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물 위에서 살아 있다. 이것이 왕을 우울케 한다. 시큼하다. 야릇하도록 시큼하다. 까마귀가 머리 위를 난다. 레테가 왕을 깨운다. 마신다. 싼다. 튄다. 이 옷을 벗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물의 우울에서 도피하기 위해 술에 빠진다. 나를 명료하게 붙잡기 위해 술을 마신다. in vino veritas. 그러나 그 역시 흐르며 물로 나온다. 혹은 물에 빠져 죽는다. 해면과 몰약. 마찬가지로 나로 하얗게 남아 있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도 한다. 하지만 포근하게 덮은 하얀 눈조차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녹으며 흐르는 것을.
그래서 오르페우스가 노잡이들의 귀를 막는다. 흐름은 흐름으로, 스며듦은 스며듦으로. 물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기 위하여. 아케론을 가로지르기 위하여. 아아, 엘뤼시온의 딸들이여. 비가 올수록 선율은 더 촉촉하고 감미로워진다. 현은 고통을 튕기며 새로 자아낸다. 흐름을 변주하면서. 흐름을 새로 낳으면서. 계속해서 흘려보내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와 함께.
삶 자체를 연주할 수 있다면. 물보다 빠르게 흘러갈 수 있다면. 물에 침범당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양분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시를 읊는 고양이는 고고하게 나아가는 불침선을 꿈꾼다. 선량한 파이아케스인들의 항구에 가면 그만큼 단단한 배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가 되는 것은 이름이듯이 문제가 되는 것도 언제나 이름이다. 그리하여 모든 노래는 난파하고 난파한 곳에서만 노래는 태어난다. 문제는 물 자체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존재 방식. 왕은 흰 돛에 튄 얼룩에서 지도를 본다. 날아가는 까마귀를 따라 고개를 드니 무지개가 있었다. 손가락을 거는 대신 시위를 걸어야 한다. 그 현에서 열두 방향을 자아내기 위해. 하늘에서 우물까지 물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든 튄다. 기쁘도록 우울한 레테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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