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레더릭 와츠, <미노타우로스>. 이미지 출처)
어떤 경우든, 그는 관성을 넘어설 힘이 부족한 것이다. 자신의 계획에 대한 기쁜 확신에 가득차 기꺼이 일어서고, 계획의 안정적 작동을 믿으며 내일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기쁘게 잠드는 그런 힘이. 현재를 잘 살려면 먼저 미래를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하는 것, 이불을 펴고 개는 것은 미지의 이질적이고 불쾌한 세계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 아니, 지금 안겨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예측 가능하고 편하며 안정적인 쾌를 준다. 자족적 구슬. 그에게는 시간을 능동적으로 가로지르며 꿰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곳곳에 흩어진 구슬들을 꿰어 미궁 밖으로 나갈 실이, 시간 곳곳에 흩어져 묶여 있는 나의 조각들을 이을 일관적이고 능동적이며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주체적 기획이. 곳곳에 보수적으로 할거하고 있는 봉건 영주들의 힘을 규합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과업으로 나아갈 중앙 집권적 권력이 부재한 것이다. 주체 없는 엉덩이.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의미다. 인간 세계 부동의 원동자는 판도라다.
짜릿하고 열정적이며 달달한 연애 초기의 데이트 준비를 떠올려 보라. 몸 전체가 섬세한 활과 같이 목표를 향해 유기적으로 탄력 있고 빠르게 움직인다. 더 이상 활과 궁수는 구분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만큼 데이트의 끝, 연인을 보내야 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관성이 작용한다. 천둥 소리와 함께 비라도 내렸으면. 이 완벽한 순간보다 더 높은 실을 테세우스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한 데이트의 완성은 깔끔한 작별」이라거나 「오늘은 긴 연애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는 차가운 합리적 전망이 필요하다. 아테네적 주체.
물론 꼭 실이 있어야만 잘 일어나고 잘 자는 건 아니다.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눕게 하는 또다른 힘, 그것은 습관이라는 또 하나의 관성이다. 관성은 관성으로 다스려야 한다. 예컨대 단단한 군인적 삶. 유감스럽게도, 잘 못 자고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은 습관이라는 개념과 친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습관이라는 군대적인 거친 개념에 은밀한 반감을 품는 예민하고 섬세한 영혼, 습관을 강요하고 쌓아 올리기에는 게으른 몸뚱이, 대충 잊지 못하고 여기 저기 답 없는 고민의 미궁을 헤매다 날밤을 지새우는 구제 불능 올빼미인 것이다. 섬세한 자는 게으름뱅이보다 게으르다.
섬세한 사람은 변화의 고통을 강하게 느낀다. 모드를 바꾸는 것은 불쾌한 소모다. 현 인간 문명은 인간 육체에 강요되는 잦은 불쾌한 소모를 극복할 수준은 안 되는 듯하다. 예컨대 심즈의 강철 방광. 습관과 신경 안정과 무감화라는 억센 처방을 기대하긴 어려우므로, 그에게는 그를 말에 올라탄 듯이 무아지경으로 신나게 달리게 할 주체적 목표가 필요하다.
사실 가장 쉽고 단순한 이유는 영양의 불충분한 공급으로 인한 체력 및 기력 부실이다. 어디의 빈국 이야기냐고? 너무 먹을 게 없어 닭가슴살과 풀때기만 먹고 사는 상습적 다이어트족들의 이야기다. 몸에 연료를 충분히 공급하지 않으면 정신도 의지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 대신 울기만 하는 갓난애도 아는 사실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쇠고기와 프룬 따위의 허섭한 저녁 식사로는 등뼈의 램프가 켜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다이어트 같은 걸 하면서 고유한 개인을 운운하는 인간은 적어도 뇌는 충분히 말라 보인다. 그들의 삶도 체중도 관성이다. 물론 자연스런 동물적 원리를 넘어서는 정신력은 실제로 있다. 예컨대 제갈량 같은 철인은 식소사번 국궁진췌 사이후이의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건 본받으면 못쓴다. 물론, 똑같은 식소 사이후이라도, 애초에 인간을 현대의 비키니 마네킹들과 비교하는 게 난센스고 실례다.
주체적 목표와 미래의 결여, 규칙적 습관의 와해, 주제에 맞지 않는 매사에의 섬세함과 우울함, 불규칙한 생활이나 다이어트 등으로 인한 영양 공급 불량과 체력·기력 감소… <대학생의 방학> 같은 제목을 붙이면 좋지 않을까? 차라리 고등학생까지는 다이어트 같은 사회의 나쁜 물에 오염되지 않고 규칙적으로, 강제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지나칠 정도로 잘 먹으니 그나마 낫다 하겠다.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은 도덕 교과서에 이미 쓰여 있는 말들이다. 그런데 그 정도로 사는 것도 너무나 어렵고도 드물다. 왜? 그것은 로마 제국에게나 가능한 걸까?
그런데 왜 그렇게 올바르게 살아야 할까? 왜? 왜 목표를 가진 주체가 되고, 단단하고 억센 습관을 들이고, 규칙적으로 충분하게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걸까? 왜 쾨니히스베르크의 프로이센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죽어야 하는 자를 태운 버스는 급정거와 급발진을 정신 없이 반복하며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나 만수산 드렁칡도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술을 마신다는 것을 잊기 위해 계속해서 술을 마실 뿐이다. 존재해야 한다는 것, 즉 움직여야 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고 재앙이다. 「잠이 좋다. 죽음은 더 좋다.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으리라.」 모든 합리를 와해시키는 존재의 관성. 날카롭게 시간을 새기던 시계는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그러나 그대는 반짝이는 시계침 위로 몸을 던지지조차 않는다. 시계침도 녹아 버렸기에?
그것은 나쁜 질문이다. 소는 누가 키운단 말인가? 네가 배가 부르니 그런 한가한 헛소리를 하는구나. 일해라. 땀 흘려 일해라. 가시를 빼라. 흙으로 돌아가라.
이 관성적 허무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공허보다는 폭력적인 욕망을 갈구한다는 사실과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그의 몸은 평화를 갈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관성적 허무는 의미 추구적 직조와 조율 과정에서 생긴 치명적인 오류―이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면―다. 예컨대 한쪽으로만 기형적으로 비대하게 발달한 섬세함과 종합적 능력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괴리. 죽음 예찬은 이 괴리된 자아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좋은 어리광이게 마련이다. 「수학이 인생에 뭔 필욘데!?」가 언제나 프라이드와 수학 실력의 괴리에서 나오듯. 다만 이에 대한 답을 정말로 가지고 있지 못한 사회가 이 희비극의 또다른 주연이다. 미궁의 출구는 주정뱅이의 발에 의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기계를 돌려 대는 공장-사회가 주지 못하는 것을 동굴의 밑바닥에서 발견할 수도 있는 법이다. 몸의 소리를, 새로운 길을, 새로운 리듬과 템포를.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것을. 탄생의 땅 크레테는 그럴 만큼 충분히 메마르도록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