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건너 인사드리네요. 안녕하세요! faller입니다. 최근에 아르바이트를 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도 글은 한편 올려야 하는데 어쩌지 어쩌지 하다 결국 상당히 미뤄졌네요. 이번엔 인식론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써보려고 해요.
철학의 주요한 분과들
철학은 원래 분과를 나누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한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자연과학, 수학, 사회학 등이 철학과 분리된 과목으로 다뤄지는 만큼 순수한 철학의 분과가 무엇인지 얘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우선, 메타 자연과학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형이상학이 있어요. 또,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미학과 윤리학으로 구분할 수 있는 가치론이 있고, 순수철학인지 응용철학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논리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할 대상이고 저번 글에서 ‘인간은 어떻게 정신 밖의 대상을 인지하고 사고할 수 있는거지?’라고 얘기했던 인식론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능력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상을 인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사고할 수 있고, 또 사람과 사람간에 의사소통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지적 능력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선, 우리의 감각기관은 왜곡되기 쉽습니다. 멀쩡한 막대기를 물 속에 반쯤 넣으면 휘어진 것처럼 보이게 되듯이요. 우리의 사고 능력 또한 완전히 합리적이진 못하죠. 일례로 프로이드는 꿈을 예시로 들며,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완전한 합리, 논리적 체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명사, 즉 이름을 통해 대상을 지칭하지만, 그 이름과 대상 사이엔 어떤 필연적 관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임의의 대상을 ‘의자’라고 지칭할 때, 그것이 의자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 다리가 4개라는 점? 나무로 만들었다는 점? 엉덩이를 댈 쿠션과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다는 점?
예시를 위해 두 사진을 가져왔는데요, 우리는 두 대상을 모두 ‘의자’라고 부르지만, 둘 사이엔 필연적인 공통점이 없습니다. 다리의 모양도 다르고, 재질도 다르고, 팔걸이가 있냐 없냐 등도 차이가 있네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두 대상이 비록 물질적 공통점이 없을지 몰라도, 두 대상 모두 우리가 편하게 앉기 위해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즉, ‘의자’라는 말은 ‘다리가 4개 있거나.... 등받이가 있거나.... 한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편하게 앉는데 사용하는 도구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주장이죠.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우리는 이런 박스에도 앉을 수 있죠? 물론, 박스의 주된 쓰임새는 다른데도 있습니다만, 의자 역시 앉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도 사용할 수 있죠.
즉, 정리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자들의 공통점을 추려내서 ‘의자’라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공통점이란 게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천재적인 디자이너와 공학자가 우리의 상식을 깨트린 완전히 새로운 의자를 개발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다리도 없이 공중에 떠다니고, 액체로 만들어져서 출렁출렁 거리고 시원합니다. 기존에 있었던 의자들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지만 어쨌든 의자라고 만들었고 앉으면 매우 편안하니 의자는 의자입니다. 이 경우엔 실제로 존재하는 의자가 ‘의자’라는 이름의 개념을 흔들어 버렸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인식적 한계가 갖는 문제점은 수학, 과학과 같은 엄밀한 학문에 비춰보았을 때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선이 가진 정의는 두께가 없고 휘어짐이 없는 선이고, 삼각형은 세 개의 각과 세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입니다. 그런데, 현실엔 두께가 없는 직선 따윈 어디에도 없어요. 아무리 세밀한 펜으로 선을 그린다 해도 그 세밀한 만큼의 두께가 주어지고, 또 자를 대고 그린다 하더라도 조금의 휘어짐도 없는 완벽한 직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각형도 마찬가지죠. 삼각형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선은 어느 정도 휘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꼭지점을 기준으로 한 각 세 개 역시 올바른 각도가 아닐 수밖에 없고, 애초에 각이 3개이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직선이나 삼각형과 같은 개념을 통해 기하학을 발전시켜서 현실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세우죠. 또, 아무 문제없이 명사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하구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완전한 관념을 토대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요?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합니다.
플라톤과 이데아
현실세계는 불완전하지만, 완벽한 관념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 이데아의 세계엔 현실에 있는 개념들의 완벽한 원본이 존재한다. 우리의 정신은 이데아에 속한다.(혹은 속했었다.) 즉, 우리는 현실에 있는 여러 대상들의 공통점을 추려내 완벽한 관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완벽한 개념(이데아)를 먼저 알고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보고 이것이 의자다, 삼각형이다, 직선이다 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거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동굴의 비유, 선분의 비유 등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결하게 얘기하자면 위와 같습니다. 아마 이 설명을 들은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데아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또,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인식론의 전부인 것도 아니며, 내용적인 논리 결함으로 비판받는 면 또한 많습니다. 다만, 여기서 여러분이 알아두시길 바라는 점은, ‘이데아론’과 같은 것이 요청될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인식체계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간결하게 쓰고 싶었는데 조금 길어졌군요. 자꾸 글을 건드리다보니 영영 올리지 못할 것 같아 이만 정리하고 포스팅합니다. 다들 장마철 조심히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