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드레이크 사략선 해적기 스컬 앤 본즈 부시와 캐리 한통속 해골단 해적질하는 한국 정부

in kr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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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역사를 바꿔 놓은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해적이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사건이다. 이로써 영국은 헨리 8세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거쳐 성공회를 통해 제정일치의 종교+정치의 연합을 이뤄 재정을 왕이 독점해 카톨릭 교황으로부터 엑소더스를 한 사건으로 나중에 절대왕조의 기반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정부군인 무적함대 스페인을 무찌른 사람은 군인이 아닌 해적 출신이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 1540년경~1596년 1월 27일)은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이다. 라틴어 이름은 프란시스쿠스 드라코(Franciscus Draco), 스페인어 이름은 프란시스코 드라케(Francisco Draque)이며, 해적 때문에 골치를 앓던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드라코' 혹은 '엘 드라케'라 불렀다.(다만 당시 해적 행위는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일주를 달성했다.
1581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1543년의 2월(혹은 3월),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남부 잉글랜드 데본의 타비스톡(Tavistock)에서, 에드먼드 드레이크(Edmund Drake)와 메어리 밀 웨이(Mary Mylwaye)의 사이에 12명의 자식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민이었던 아버지 에드먼드 드레이크는 프로테스탄트로서 후에 목사가 되었다. 열 살을 넘겼을 무렵부터 이미 인근의 늙은 선장 밑에서 항해에 종사했다. 선장으로부터 근면함을 인정받고 그의 배를 물려받은 드레이크는 배를 팔아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
친척 존 홉킨스 밑에서 노예 무역에 종사하던 그는 1568년 자신의 배를 가진 선장이 되었다. 그 후로도 존 홉킨스의 선단에 참가했는데, 베라크루스 부근에서 에스파냐 해군의 기습을 받고 선단은 거의 괴멸 상태가 되어, 드레이크는 목숨만 겨우 건져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경험은 훗날 드레이크의 전 생애에 걸친 에스파냐에 대한 복수심을 품게 했다.
1569년에 메어리 뉴먼(Mary Newman)과 결혼했다(메어리는 12년 후에 죽었다). 1570년 이후부터 드레이크는 서인도 제도의 에스파냐 선박이나 식민지 마을을 습격하는 등의 해적 활동을 시작했다. 1573년에는 파나마에서부터 금ㆍ은을 운송하던 에스파냐 선박들을 습격해 막대한 재보를 손에 넣었다.
1577년 11월, 배수량 약 300t의 갤리온선 골든 하인드 호(Golden Hind)를 중심으로 한 다섯 척의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 항을 출항, 대서양에서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까지 진출해, 칠레나 페루 연안의 에스파냐 식민지나 배를 덮쳐 다시 한 번 막대한 재보를 약탈했다.(그 중에는 에스파냐 왕의 재보를 실은 카카푸에고 호 등도 있었다.) 카카푸에고 호에는 은 26t, 금 80파운드, 화폐와 장식품 13상자 등 모두 20만 파운드 상당의 재물이 적재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며, 이 보물을 옮겨 싣는 데만 5일이 걸렸다고 한다. 도중의 산 프리언에서 원정 출항의 공로자로서 친교가 깊었던 토머스 도우티를 6월 30일에 스스로 재판장으로 나선 군사재판에서 반역죄로서 처형했다.(다만 시체는 정중하게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태평양을 가로질러 모루카 제도, 나아가 인도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국함으로써 페르디난드 마젤란에 이은 두 번째의 세계일주를 달성했다. 또한 이 도중인 1578년에 혼 곶과 드레이크 해협을 발견하고 있다.
1580년 9월, 유일하게 살아남은 골든 하인드 호가 프리마스 항에 귀항했고, 항해 중에 얻은 금은 재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쳐졌다. 이는 30만 파운드를 넘는 것으로 당시 잉글랜드의 국고 세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 측에서는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그를 영국 해군의 중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훈장을 수여(제독의 칭호)했다. 1581년에는 플리머스의 시장으로 선출되지만, 에스파냐와의 국교 악화로 다시 바다로 돌아와 에스파냐령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다. 이때 여왕은 영국 해군의 병력까지 직접 내주면서 드레이크의 해적질을 대놓고 도와줬고, 이것이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가 '무적함대' 아르마다 함대를 내세워 영국을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585년에 엘리자베스 시덴햄(Elizabeth Sydenham)과 재혼했다. 1587년에는 카디스 만에서 에스파냐 함대를 습격했고, 1588년의 아르마다 해전에서 찰스 하워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영국 함대의 부사령관으로서 잉글랜드 함대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화약과 기름을 싣고 불을 붙인 배를 적의 함대로 보내는 해적식 전법을 통해 당시 '무적함대'라 불리던 에스파냐 함대를 궤멸시켰다. 그러나 하워드 제독과의 갈등으로 드레이크는 부제독 자리에서 해임된다. 드레이크는 하워드 제독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으며, 약탈에 몰두하다가 자신의 함대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가 약탈한 금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친 덕분에, 실질적으로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파산 위기에 몰렸던 영국 왕실의 재정은 당시 징발된 상선과 군사에게 후한 급료를 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해졌고, 이때문에 드레이크를 실질적인 전쟁의 최고 공로자라고 보기도 한다.
드레이크의 뱃사람으로서의 경력은 그가 오십줄에 접어들 때까지 이어졌다. 1595년의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의 싸움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뒤, 푸에르토리코의 산 후안의 싸움에서 패한다. 산 펠리페 델 모로 섬(Fort San Felipe del Morro)에서 에스파냐 출신의 포격수가 드레이크가 탄 배를 향해 대포를 쏘았지만, 드레이크는 살아남았다. 1596년, 에스파냐의 인디아스 함대가 피난처를 찾고 있던 파나마의 포르토벨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있던 중 그는 죽었다. 사인은 이질에 의한 병사였고 그때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죽기 직전에는 병상에서 갑옷을 입으려고 하는 등 정신착란 상태를 보였다고 한다(죽을 때 멋있게 죽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생에 자식은 없었으며,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포르토벨로 부근의 바다에 수장되었다. 오늘날까지 다이버에 의한 수색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과 스페인의 아즈텍, 잉카 정복 이후 해적들의 눈길은 소위 스페인 대해라 불리는 곳으로 쏠리게 되었다. 스페인 대해란 스페인이 정복한 카리브해의 섬들과 멕시코만까지를 일컫는 말로, 각종 귀금속을 싣고 본토로 향하는 스페인의 선박들은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물론 스페인도 모르지는 않아서 이들이 자주 쓴 갈레온 범선은 선원만 200명에 포가 최대 60문까지 장착되어 있었지만 느려서 재빠른 해적선들을 대처할 수가 없었고, 100척에 이르는 대규모 선단을 이뤄서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특히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이러한 스페인의 선박들을 습격해서 쏠쏠한 수입을 얻었는데 그 뒤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묵인이 있었고 결국 이는 무적함대의 영국침공을 부르는 한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드레이크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냥 보물선만 턴 것이 아니라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들도 직접 쳐들어가기도 했다. 산토도밍고를 덮치기도 했으며, 콜롬비아 지방도 공격했다.
영국의 제임스 1세가 1601년 자국의 적국선박 나포 허가장을 거둬들이면서 카리브 해의 해적은 사략선이 아니라 부카니어들이 차지했다.이들은 돼지와 소를 사냥해서 고기, 지방, 가죽을 지나가던 배에 팔고 살았는데, 맨 처음 거점은 히스파니올라 섬이었으며, 스페인인들이 공격해서 동물들을 없애버리자 주변 섬으로 흩어지면서 형제단으로 뭉쳐서 에스파냐 배들을 공격했고, 여기에 죄수,무법자,도망노예가 합세해서 수를 불렸다.아무 법도 따르지 않고 잔인한 규율로 악명높았는데, 일례로 프랑스 출신의 프란시스 로요네는 포로를 잡으면 고문하다가 토막내서 죽였고, 로크 브라질리아노는 스페인인 농부를 산채로 불로 구워 죽였다고 한다. 특히 로요네의 경우는 산 채로 포로의 심장을 꺼내서 다른 포로의 입에 처넣었다고 한다.
이 부카니어 출신 중 유명해적으로는 자메이카의 총독까지 오른 헨리 모건이 있다.

애덤 로버놀트와 윌리엄 르 소바즈에게... (중략) ...바다에서건 뭍에서건 적을 괴롭히고... (중략) 모든 수익의 반을 짐과 함께 나누도록... (중략) 허가하노라.
영국의 왕 헨리 3세가 1243년에 발행한 적국 선박 나포 허가장 中
사략선私掠船privateer/corsair국가 공인 해적선. 즉 국가로부터 타국의 선박을 나포하고 노략질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해적질을 하는 선박. 초기에는 그냥 개인 전함이라 불리기도 했고, 사나포선(私拿捕船), 포획사선(捕獲私船)이라고도 한다. 이런 나포 허가장을 사략면장(Letter of Marque)이라고 하는데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가 일반 허가장. 이것은 전시에 개인 함선이 적의 배를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는 허가장이다. 두번째가 특별 허가장. 평시에 해적에게 공격당한 상인이 신청하는 것인데 빼앗긴 상인이 "자기 재산을 되찾기(?)위해" 약탈한 해적이 소속된 국가의 배를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해적들은 일반 허가장을 선호했는데, 어차피 유럽사에서 전쟁 터지는건 발에 채일만큼 흔한 일이었고 일반 허가장은 위에서 썼듯 약탈량에 제한이 없다.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 개발 직원들에 '해적이 되자!' 란 소리를 했고, 이에 한명이 졸리 로저에 애플 로고를 그려넣은 기를 만든다. 그 후 거진 이 '해적이 되자'는 애플의 모토가 되었다.
청년비례대표 후보인 김모 씨가 트위터에 "제주 해적기지 건설 반대한다. 강정마을과 구럼비 바위를 지켜내자"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만화 원 피스에서도 해적을 미화하기도 했는데 사실 국가가 합법적으로 도둑질[해적질]을 하는 것이다.
해적 하면 특이한 해골과 상완골 뼈가 엑스자로 겹쳐져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깃발의 문양이 스컬 앤 본즈란 해골단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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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le's candidates for the White House pictured in their student days and the 'Skull and Bones' mascot (예일대 안에 잇는 비밀단체, 프리메이슨단체중 하나인 뼈와 해골로 이뤄진 해골단 ) 존 케리와 아버지와 아들 부시는 해골단 멤버였다.
미 플로리다 대학에서 열린 존 케리 상원의원의 연설 도중 일어난 사건 직후 학생들은 경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시위를 벌였다.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의원님은 부시 대통령과 함께 예일대 비밀 클럽의 회원이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경찰관 두 명이 이 학생을 저지하고 학생이 저항하자 경찰관 두 세명이 더 달려들어 바닥에 눕히고 진압해 신체를 잠시 마비시키는 전기총인 테이저 총을 쏘자 고통스러운듯 비명을 지르는 동영상도 있다.
부시에게 비밀단체(secret society)에 대해 질문하는 동영상. 사회자가 부시에게 skull and bones(뼈와 해골) 멤버 아니냐 질문하니, 부시가 너무나 비밀이라서 말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2004년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조지 W 부시, 민주당의 존 케리, 하워드 딘, 조지프 리버맨 등이 바로 1960년대에 예일대를 내의 엘리트 서클인 ‘해골과 뼈’(Skull and Bones)멤버였던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영국의 텔레그라프는 ‘부시와 케리를 묶는 비밀 사회’라는 기사에서“‘예일대 현상’이 미국 내 격한 엘리트주의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172년 전통의 ‘해골과 뼈’는 권좌를 지향하는 배타적이고 비밀스런 서클로 한 해에 15명만을 받아들이지만 이미 윌리엄 태프트, 조지 부시 부자등 3명의 대통령과 각계 지도자를 배출했다. 회원들은 걱정보다는 “누가 이기든 우리에겐 ‘윈-윈’(win-win)게임”이라는 속 편한 입장이라고 한다. 지난 1988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후보가 미국의 41대 대통령에 당선된후
조지 H W 부시는 예일대 경제학과를, 빌 클린턴은 예일 법과대학원, 그리고 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예일대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부시 가문이 석유재벌과 결탁해 나라를 망쳐먹었음을 비판하지만 또 존 캐리가 국무장관으로 나쁜짓을 한 것은 잘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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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인인 부시나 클린턴등은 영국에서 도망자들이 결국 영국의 약탈을 합법화한 사략선을 통해서 영국이 경제성장하고 산업혁명으로 근대국가로 나가 식민지를 착취한 대영제국을 그대로 따라했다.
대영제국, 파스 아메리카 미국만 전세계적으로 해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도 해적질을 한다. 즉 형법을 초월해 경마, 경륜, 소싸움, 로또, 주식, 강원랜드 카지노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국민 서민의 돈을 약탈해가 복지예산에 쓰인다는 거짓말로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는 정말 파렴치한 짓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때 종로를 하야시와 김두한이 관리를 했는데 김두한도 장사하는 사람을 등쳐서 삥을 뜯은 것이다. 즉 검은 고양이가 흰 고양이보다 쥐를 덜 괴롭히겠지만 쥐를 죽이고 사냥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참고로 스티브 잡스가 해적이 되자고 한 것을 보면 필자는 영국 엘리자베스 시절 군인도 못 이기는 무적함대를 드레이크란 서양의 성경에 나오는 용의 별명을 가진 해적이 해낸 것을 보면 교훈을 가져가야 한다.
인터넷 유머를 보면 다음이 있다.
군인들이 PX에서 다과를 들며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그때 소대장이 갑자기 들어섰고,군인들은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며 경의를 표했다.
기분이 좋아진 소대장 왈,
"그래, 편히 쉬어, 오늘 너그들한테 들려줄 기쁜 소식이 있다"
궁금해진 장병들 침을 삼키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우리나라 여성이 좋아하는 남성상 2위에 바로 너그들, 군인이 뽑혔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서로 기뻐했다.
잠시후 한 병사가 물었다."그러면 1위는 누굽니까?“
소대장이 대답했다. “1위는 민간인이다.”
드레이크란 해적에 해군이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약탈을 합법화하여 경제적으로 이득을 최고로 가져가는 시장과 기업의 이윤 추구의 동기를 절대 정부는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제발 암호화 화폐 시장에 헌법 119조를 위반하면서 4대 거래소와 6개 은행에 독점적으로 특혜를 민간 개입을 말고 어짜피 민간인들과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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