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14

in kr •  6 years ago 

중학교 삼 학년 때였다. 그때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모여서 농구를 자주 했었다. 한창 원기 왕성할 때라, 좀 거칠다싶을 정도로 승부에 집착하는 바람에 치열한 몸싸움까지 벌이며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일찍부터 태권도와 합기도, 유도 등의 다양한 격투기를 배웠기 때문에 또래에 비해 체력도 좋고 거친 몸싸움도 잘하는 편이었다.

당시에 키가 큰 편에 속했던 나는 농구를 할 때면 주로 센터를 도맡았다. 그야말로 센터라면 상대편 선수 누구하고도 몸싸움을 벌여야 하는 힘든 자리였다. 그러다 보니, 심한 몸 접촉에 자주 넘어지고, 그래서 신경은 더 날카로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옆 반에 새로 전학 온 인구라는 녀석이 상대편에서 뛰게 되었다. 인구의 키는 꽤 큰 편에 속했던 강재보다 오히려 한 뼘 정도는 더 컸고, 전학 오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농구선수로 뛰기도 했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농구를 잘 한다고 해도 선수 생활을 한 사람에게 이기기는 힘든 법이었다. 게다가 인구는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남달리 승부욕도 강했고, 직업선수들이 하는 거친 플레이들도 곧잘 해왔던 것이다.

그런 인구와 골밑에서 상대하려니 나로서는 당연히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무술을 잘 하고 힘이 세다 하지만 농구를 힘만 가지고 할 수는 없는 거여서 점수 차는 자꾸 벌어졌다. 게다가 인구가 시종일관 거칠게 플레이를 해오는 통에 수시로 바닥으로 나뒹굴어야 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되자, 어느새 나도 인구를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가면 승부는 뻔 한 것이었고, 이대로 질 수 없다는 오기로 인해 농구시합은 거의 주먹질만 오가지 않았을 뿐 난장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구는 선수생활의 경험과 자만심으로 내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다. 실로 점입가경이었다.

인구가 단독으로 드리블을 해올 때, 마침 골대 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인구는 내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듯 요리조리 몸을 놀리며 현란한 드리블로 골밑을 파고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공격하는 인구나 수비하고 있는 나나 그 싸움에서 지는 쪽이 망신을 당할 것은 이미 정해진 이치였다. 본의 아니게 우리 두 사람의 대결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인구는 계속 파고들었고, 나는 양팔을 최대한 벌리고 바짝 달라붙어 인구를 막았다. 한참 파고들던 인구가 슛을 쏘려는지 껑충 뛰어올랐다. 나는 인구가 공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이 몸을 솟구쳤다. 두 사람의 몸은 공중에서 부딪쳤고, 그 와중에도 인구는 링을 향해 슛을 던졌다. 나 역시 던져진 슛을 어떻게든 쳐내려고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은 내 손끝을 살짝 스치며 골대로 날아갔고, 중심을 잃은 내 손은 인구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손바닥에 아주 강한 전류가 통과하는 듯 한 찌릿한 느낌에 이어 배구공을 힘껏 내리친 것 같은 떨림이 찌르르 전해져 왔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강하게 얻어맞은 인구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뇌진탕을 당했는지 입으로 거품을 부글부글 내뿜으며 눈을 허옇게 뒤집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인구는 간질 환자였다. 지랄병이라고 불리던 불치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간질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어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인구는 한참 만에 깨어났지만 양호선생님이 급히 부른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며 인구가 탄 앰뷸런스가 뽀얗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농구 골대를 바라보다가 골대 밑에 덩그마니 놓인 인구의 책가방을 발견했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암갈색 책가방이 마치 인구의 모습 같아 나는 가슴 한 구석을 바늘로 한 뜸 한 뜨고 있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나는 밤이 늦도록 인구의 책가방을 안고 골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인구의 책가방에 얼굴을 파묻고 망연히 앉아 있었다. 발밑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개미들의 작은 그림자가 없어지고 달빛이 아스라이 교정을 비출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강재, 아니냐?“

마침 그날 숙직이셨던 중 2 때 담임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연락을 해 어머니가 달려올 때까지 나는 인구의 낡은 책가방을 꼭 끌어안고 농구 골대 밑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자마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할 때면 어김없이 되살아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곤 했다.

그런 일이 있고 인구는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흉한 꼴을 보인 자신이 부끄럽다는 이유였다. 인구의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인구의 집을 돌아 나오며, 나는 심한 자책감에 울고 싶었었다. 마치 그 사건으로 인구가 간질에 걸리게 된 것처럼. 며칠 후 인구는 끝내 이 세상을 저버리고 말았다. 자기 집 뒤뜰에 있는 감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권총을 들여다보았다. 소음기가 달린 영국제 권총이었다. 장 부장이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손에 쥐어주던 섬뜩한 느낌의 그 쇳덩이였다. 나는 차안 깊숙이 몸을 숨기고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차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인 느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의 고통이 지금 바깥쪽을 내다보고 있는 나를 부단히 괴롭혔다. 마이클 로빈을 죽이고 만 것처럼 또 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순간이 지난 과거의 반복이라는 것을 느끼며, 자꾸 불길한 생각이 깔리는 마음의 한 자락을 쉽게 거둬들일 수 없었다. 그 예감은 지금까지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갑자기 인구가 생각난 것은 이 권총의 색깔이 내가 밤늦도록 부둥켜안고 있던 인구의 가방과 똑같은 암갈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인구의 자살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여된 나의 입장에서 인구의 죽음은 내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부연하자면, 가방의 손잡이를 잇는 고리의 섬뜩한 느낌이 바로 총을 움켜쥐었을 때의 차가운 느낌과 흡사했기 때문이었고, 그때처럼 또 예기치 못한 일을 저지르고야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한없이 솟구쳐 오를 때 느껴지던 아찔한 징후. 그런 불길함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했나 보다.

‘찰칵.’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음기가 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탄창에 총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빈총으로 승부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었다. 정말 무모한 짓이라고 나 자신을 질타했지만, 혹시 잘못해서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어찌됐든 위험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생각이었다.

아직 유종석 정보부장은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유 부장이 집으로 돌아오려면 이 길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 길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끈 채 어둠 속을 한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어둠은 낯선 모습으로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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