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4)
카밀루스는 본인 스스로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 몫의 공동집정관을 바라는 시대정신에 충실히 복종했다.
아니오 강변의 싸움은 카밀루스가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참전한 전투였다. 벨리트라이는 무혈로 접수한 까닭에서였다. 이제 고단한 정치투쟁의 무대가 병든 노구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는 초장부터 불리했다. 승리에 고무된 민중이 더욱더 커진 목소리로 집정관 선출 방식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었다. 원로원은 카밀루스를 전면에 내세워 기존의 선출 방법을 고수하려고 시도했다.
하루는 카밀루스가 포룸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평민 호민관이 파견한 하급관리 한 명이 그를 찾아와 동행을 요구했다. 카밀루스가 동행 요구에 응하지 않자 호민관 측 관리는 노인을 힘으로 끌어내려고 했고 그러자 포룸 전체가 양측을 지지하는 무리들 간에 오가는 설전으로 곧 시끄러워졌다. 성미가 괄괄한 몇몇 사람들은 거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카밀루스는 만리우스 사건 때와 비교해 로마 사회의 정치경제적 역학관계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시대의 변화에 더 이상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의원들을 인솔해 원로원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회의장에 들어가기 직전 카밀루스는 카피톨리움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신들에게 화합과 안정을 로마에 부디 내려 달라고 간절하면서도 엄숙하게 기도했다.
원로원은 격론 끝에 민중에게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두 명의 공동집정관 중에서 한 사람을 평민 출신의 인사로 채우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이 마침내 이뤄졌다. 이로써 로마는 명실상부한 공화정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민중은 원로원의 결단에 박수갈채로 경의를 표하고는, 로마를 오랫동안 혼란 속으로 몰아넣어온 계급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카밀루스를 자택까지 따뜻하게 배웅하였다.
평민들은 다음날 민회를 열어 카밀루스의 전날의 맹세를 따라 화합의 신에게 봉헌하는 신전을 짓기로 결의하였다. 곧이어 집정관 선거가 진행되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가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집정관으로, 루키우스 섹스투스가 최초의 평민 출신 집정관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이 선거를 주관한 인물은 다름 아닌 카밀루스였다. 평민계급과 귀족계급이 각각 1인씩의 집정관을 선출하게 되는 로마공화국의 정치적 변동과정을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세계사 교과서들에서는 서력으로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법이 제정된 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듬해 로마에는 전염병이 심하게 돌았다. 역병에 희생된 기나긴 사망자들의 명단에는 늙고 쇠약해진 카밀루스도 포함돼 있었다. 비록 병으로 죽었을지언정 카밀루스는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고인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했다. 로마를 재건하고 중흥시킨 위기 극복의 명수인 카밀루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4)
카밀루스는 본인 스스로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 몫의 공동집정관을 바라는 시대정신에 충실히 복종했다.
아니오 강변의 싸움은 카밀루스가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참전한 전투였다. 벨리트라이는 무혈로 접수한 까닭에서였다. 이제 고단한 정치투쟁의 무대가 병든 노구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는 초장부터 불리했다. 승리에 고무된 민중이 더욱더 커진 목소리로 집정관 선출 방식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었다. 원로원은 카밀루스를 전면에 내세워 기존의 선출 방법을 고수하려고 시도했다.
하루는 카밀루스가 포룸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평민 호민관이 파견한 하급관리 한 명이 그를 찾아와 동행을 요구했다. 카밀루스가 동행 요구에 응하지 않자 호민관 측 관리는 노인을 힘으로 끌어내려고 했고 그러자 포룸 전체가 양측을 지지하는 무리들 간에 오가는 설전으로 곧 시끄러워졌다. 성미가 괄괄한 몇몇 사람들은 거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카밀루스는 만리우스 사건 때와 비교해 로마 사회의 정치경제적 역학관계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시대의 변화에 더 이상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의원들을 인솔해 원로원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회의장에 들어가기 직전 카밀루스는 카피톨리움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신들에게 화합과 안정을 로마에 부디 내려 달라고 간절하면서도 엄숙하게 기도했다.
원로원은 격론 끝에 민중에게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두 명의 공동집정관 중에서 한 사람을 평민 출신의 인사로 채우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이 마침내 이뤄졌다. 이로써 로마는 명실상부한 공화정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민중은 원로원의 결단에 박수갈채로 경의를 표하고는, 로마를 오랫동안 혼란 속으로 몰아넣어온 계급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카밀루스를 자택까지 따뜻하게 배웅하였다.
평민들은 다음날 민회를 열어 카밀루스의 전날의 맹세를 따라 화합의 신에게 봉헌하는 신전을 짓기로 결의하였다. 곧이어 집정관 선거가 진행되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가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집정관으로, 루키우스 섹스투스가 최초의 평민 출신 집정관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이 선거를 주관한 인물은 다름 아닌 카밀루스였다. 평민계급과 귀족계급이 각각 1인씩의 집정관을 선출하게 되는 로마공화국의 정치적 변동과정을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세계사 교과서들에서는 서력으로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법이 제정된 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듬해 로마에는 전염병이 심하게 돌았다. 역병에 희생된 기나긴 사망자들의 명단에는 늙고 쇠약해진 카밀루스도 포함돼 있었다. 비록 병으로 죽었을지언정 카밀루스는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고인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했다. 로마를 재건하고 중흥시킨 위기 극복의 명수인 카밀루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