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5)
페리클레스의 양아들은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퍼뜨리는
근거 없고 악의적인 가짜 뉴스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
크산팁포스는 씀씀이가 몹시 헤펐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남편만큼이나 사치와 허영에 들떠 있었던지라 크산팁포스는 늘 돈에 쪼들렸다. 페리클레스는 주변관리에 꼼꼼하고 엄격했다. 방탕한 큰아들에게 큰돈을 쥐여 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여겼을 게 분명하다.
그럴수록 크산팁포스의 성격은 더욱더 비뚤어져 급기야 아버지 이름을 팔아 남에게 큰돈을 빌리고는 빚을 떼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페리클레스는 부채를 대신 갚아주기는커녕 이번에야말로 못된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겠다고 마음먹고는 장남을 사기죄로 고발했다.
크산팁포스는 믿었던 아버지가 배신(?)하자 아예 막가기로 작정했는지 부친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험담해댔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의 은밀한 사생활마저 함부로 까발렸다. 이들 부자 사이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크산팁포스가 역병으로 죽는 그날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렸다.
페리클레스의 가족들 가운데 장남만이 역병으로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누나 역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그의 곁을 먼저 떠났다.
가족과 친지의 때 이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결한 정신과 당당한 기상을 잃지 않았다. 단지 딱 한번 감정적으로 무너졌을 뿐이다. 형과는 달리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로 주변의 기대를 크게 모았던 둘째 아들 파랄로스의 장례식에서였다.
페리클레스는 차남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 얼굴에 약간 슬픈 빛을 띠었을 뿐 태연하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막상 자기 손으로 파랄로스의 시신에 화환을 놓게 되자 참척의 고통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서양의 페리클레스도, 동양의 충무공 이순신도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자 부성애에 무릎 꿇은 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의 후임자들은 페리클레스에 필적하는 권위와 무게감을 갖지 못했다. 아테네는 그의 복귀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페리클레스는 그를 잇달아 덮친 슬픔에 잠겨 공직에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입심과 수완이 좋은 알키비아데스가 나서서 설득작업을 펼친 끝에 페리클레스의 정계복귀를 이끌어냈고, 아테네인들은 그를 푸대접한 일을 사과하면서 페리클레스를 장군으로 선출했다.
아테네의 대권을 다시 장악한 페리클레스가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조금은 엉뚱했다. 개인적 민원사항과 관련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발의한 바 있는 가족법을 폐지할 것을 민회에 제의에 관철시켰다. 본부인이 낳아준 적자 두 명이 차례로 역병으로 죽자 페리클레스는 혼외자식이라도 족보에 넣어 가문의 대를 잇고 싶었다. 민중은 그의 바람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가 근자에 겪은 비극적 가정사가 그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충분한 응보가 됐다고 믿었다.
혼외관계로 태어나 그때까지 투명인간처럼 납작 엎드려 지내온 페리클레스의 서자는 서출에게도 정당한 상속권이 주어지도록 허락한 가족법 개정 덕분에 족보와 재산에 더해서 아버지로부터 페리클레스라는 이름까지 물려받았다. 그는 나중에 아르기누사이 제도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섬멸했지만 아테네 전사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승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는 무책임한 선동가들에게 휘둘리는 천박한 중우정치로 타락해버린 아테네 민주주의의 말로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5)
페리클레스의 양아들은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퍼뜨리는
근거 없고 악의적인 가짜 뉴스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
크산팁포스는 씀씀이가 몹시 헤펐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남편만큼이나 사치와 허영에 들떠 있었던지라 크산팁포스는 늘 돈에 쪼들렸다. 페리클레스는 주변관리에 꼼꼼하고 엄격했다. 방탕한 큰아들에게 큰돈을 쥐여 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여겼을 게 분명하다.
그럴수록 크산팁포스의 성격은 더욱더 비뚤어져 급기야 아버지 이름을 팔아 남에게 큰돈을 빌리고는 빚을 떼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페리클레스는 부채를 대신 갚아주기는커녕 이번에야말로 못된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겠다고 마음먹고는 장남을 사기죄로 고발했다.
크산팁포스는 믿었던 아버지가 배신(?)하자 아예 막가기로 작정했는지 부친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험담해댔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의 은밀한 사생활마저 함부로 까발렸다. 이들 부자 사이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크산팁포스가 역병으로 죽는 그날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렸다.
페리클레스의 가족들 가운데 장남만이 역병으로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누나 역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그의 곁을 먼저 떠났다.
가족과 친지의 때 이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결한 정신과 당당한 기상을 잃지 않았다. 단지 딱 한번 감정적으로 무너졌을 뿐이다. 형과는 달리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로 주변의 기대를 크게 모았던 둘째 아들 파랄로스의 장례식에서였다.
페리클레스는 차남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 얼굴에 약간 슬픈 빛을 띠었을 뿐 태연하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막상 자기 손으로 파랄로스의 시신에 화환을 놓게 되자 참척의 고통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서양의 페리클레스도, 동양의 충무공 이순신도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자 부성애에 무릎 꿇은 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의 후임자들은 페리클레스에 필적하는 권위와 무게감을 갖지 못했다. 아테네는 그의 복귀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페리클레스는 그를 잇달아 덮친 슬픔에 잠겨 공직에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입심과 수완이 좋은 알키비아데스가 나서서 설득작업을 펼친 끝에 페리클레스의 정계복귀를 이끌어냈고, 아테네인들은 그를 푸대접한 일을 사과하면서 페리클레스를 장군으로 선출했다.
아테네의 대권을 다시 장악한 페리클레스가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조금은 엉뚱했다. 개인적 민원사항과 관련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발의한 바 있는 가족법을 폐지할 것을 민회에 제의에 관철시켰다. 본부인이 낳아준 적자 두 명이 차례로 역병으로 죽자 페리클레스는 혼외자식이라도 족보에 넣어 가문의 대를 잇고 싶었다. 민중은 그의 바람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가 근자에 겪은 비극적 가정사가 그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충분한 응보가 됐다고 믿었다.
혼외관계로 태어나 그때까지 투명인간처럼 납작 엎드려 지내온 페리클레스의 서자는 서출에게도 정당한 상속권이 주어지도록 허락한 가족법 개정 덕분에 족보와 재산에 더해서 아버지로부터 페리클레스라는 이름까지 물려받았다. 그는 나중에 아르기누사이 제도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섬멸했지만 아테네 전사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승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는 무책임한 선동가들에게 휘둘리는 천박한 중우정치로 타락해버린 아테네 민주주의의 말로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