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6-完)

in kr •  6 years ago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6-完)


나라의 인재들을 얼굴의 점 빼듯 수시로 빼버린 뺄셈의 정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는 핵심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페리클레스가 만들었다가 철회시킨 가족법은 아테네 사회에서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이 법률은 부모 양쪽 모두가 아테네 시민인 경우에만 자식 역시 아테네 시민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해놓고 있었다. 그때 하필이면 이집트 왕이 식량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아테네를 위해 곡물을 실어 보낸 일이 있었다. 문제는 식량의 수급권자가 아테네 시민으로 한정됐다는 점이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건만 그즈음의 아테네는 곳간도, 인심도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시민권을 가진 아테네인들은 시민권이 없는데도 식량을 타간 아테네인들을 앞 다퉈 신고했고, 거의 5천 명에 달하는 아테네인들이 부정수급자로 판명되어 노예로 팔려갔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이웃사촌으로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는 부인할 수 없는 민주주의 체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방적이지 않은 폐쇄적 민주주의였다. 배타적 시민권과 도편추방이 서로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아테네에는 뺄셈의 정치가 횡행하였고, 이와 같은 뺄셈의 정치는 아테네의 화려했단 민주주의를 단명에 이르게 만든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무렵 죽음의 그림자가 페리클레스에게도 깃들었다. 역병이 그의 집 문턱을 넘어 들어왔던 탓이다. 육체의 질병은 페리클레스의 마음마저 좀먹었고, 그가 문병을 온 친구들에게 여인네들이나 차고 있을 법한 부적을 자기 역시도 몸에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었을 때 지인들은 이 위대한 거인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였다.

그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가 이뤄낸 탁월한 성과들을 입을 모아 찬양하였다. 그는 장군으로 봉직하면서 총 9개의 승전비를 그리스 세계 도처에 세웠다. 사람들이 그의 찬란한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된 페리클레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유언처럼 말했다.

“내가 남긴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업적은 살아 있는 아테네 시민 누구도 나 때문에 상을 치른 적이 없다는 것이라네.”

사람들은 차마 그의 면전에서 페리클레스의 주장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페리클레스는 안팎에서 극심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수많은 임무들을 성공리에 완수해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유는 페리클레스가 수중에 거머쥔 막강한 권력을 사익을 추구하거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는 최대한 너그럽고 인자하게 권력을 행사했다. 더욱이 부패와는 거리가 먼 청렴한 삶을 살았다.

페리클레스가 죽자마자 아테네인들은 그가 집권했던 시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생전의 그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인사들조차 그의 부재와 공백을 뼈저리게 아쉬워했다. 페리클레스를 뒤이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된 자들은 그가 생전에 보여준 절도 있는 위엄이나 존경할 만한 관대함을 하나같이 전혀 갖고 있지 못함이 머잖아 드러났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나쁜 배의 항해를 책임진 좋은 선장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은 그의 통치 방식을 독재나 전제주의에 빗대어 맹비난했다. 그들은 그가 가고 난 다음에야 페리클레스야말로 민주주위를 지키는 보루였음을 비로소 인식하고 인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비열한 무법자들이 판치지 못하도록 막는 보안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보루와 보안관 역할을 동시에 해주는 사나이가 사라진 즉시 그동안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때를 기다려온 무도한 악당과 교활한 사기꾼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쳐댔고, 아테네는 헤어날 수 없는 나락을 향해 빠른 속도로 폭주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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